멍뭉이
오늘은 서울 사는 아제가 우리 집에 오는 날이에요. 나는 서울 아제가 오면 좋아요. 서울 사는 고모할머니랑 아제는 장난감을 되게 많이 사오거든요.
엄마는 도깨비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는, 배한율. 장난감이 이렇게 많은데 또 무슨 장난감이야? 이러고 장난감을 안 사주지만 고모할머니랑 서울 아제는 장난감을 많이많이 사와요.
그리고 유치원에 가면 나는 장난감이 많은 것도 아니에요. 내 친구 재필이는 벌써 공룡 변신 로봇도 있다는데 나는 그게 없거든요. 제발 서울 아제가 멋진 공룡 변신 로봇. 재필이도 없는 걸 사와야 하는데요.
또 하나 서울 아제가 오면 좋은 점은 왕할머니 집에 간다는 거예요. 아빠의 할머니인 왕할머니는 나를 참 예뻐하거든요. 맛있는 것도 많이 주시고, 쓰다듬어주시고, 또 엄마가 나도 못 혼내게 해요. 그래서 나는 왕할머니가 정말 좋아요.
“배한율. 오늘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피. 내가 언제 안 들었나?”
“배한율.”
“우와. 서울 아제다.”
기차역에서 커다란 가방을 메고 서울 아제가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갔어요. 우리 아빠보다 뚱뚱한 서울 아제가 안아주면 푹신푹신해서 좋아요. 서울 아제는 아빠 곰처럼 배가 나와서 거기에 앉기도 편하거든요.
아빠 차를 타고 왕할머니 집에 가는데 서울 아제의 가방은 마술 가방 같아요. 장난감이 나오고, 또 나오고, 자꾸 나오거든요. 하율이 손은 두 개 밖에 없어서 다 받을 수가 없는 데도 서울 아제는 장난감을 계속 꺼내 줬어요. 재필이도 아직 없는 장난감도 있어서 기분이 좋았어요. 이제 월요일에 유치원에 가면 내가 제일 인기가 많을 거거든요.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누.”
“왕할머니.”
아빠 차가 왕할머니 집에 가기도 전인데 왕할머니가 서계셨어요. 나는 차에서 내려서 왕할머니 손을 꼭 잡았어요. 왕할머니는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한 번도 혼을 내지 않았어요. 왕할머니 집에 가면 가장 좋은 것이 커다란 멍뭉이가 있다는 거예요. 아빠가 대학생일 때 데리고 왔다는 삽살개인데, 아빠처럼 커다란 멍뭉이에요.
“멍뭉아. 멍뭉아.”
월월 무섭게 짖어서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괜찮아요. 왕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아줬거든요. 멍뭉이한테 다가와서 쓰다듬어주려고 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화를 냈어요.
“배한율. 강아지 만지면 안 돼지.”
“아, 왜?”
“손도 제대로 안 씻으면서. 얼른 들어와.”
“가자. 우리 강아지.
왕할머니도 엄마가 나를 혼내면 엄마 편을 들어요. 아마 왕할머니도 엄마가 무서운 모양이에요. 왕할머니도 엄마가 도깨비처럼 무서운 표정을 짓는 거 알고 있는 모양이에요. 멍뭉이한테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 얼른 장난감 가지고 놀려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물론 엄마를 보고 메롱. 하고 혀를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어요.
“하율아 멍뭉이 보러 갈까?”
아빠랑 블록 놀이를 하는데 서울 아제가 나를 안아줬어요. 다행히 엄마는 고모할머니랑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느라 나를 보지 않았어요. 서울 아제랑 멍뭉이도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코도 만지고 기분이 좋았는데 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배한율! 멍뭉이 만지는 거 아니지?”
“아니야.”
“정말 아니지?”
엄마는 귀신인가 봐요. 서울 아제랑 이렇게 몰래 나왔는데도 다 알고 있고 말이에요. 서울 아제는 나를 다시 번쩍 안아서 방으로 들어왔어요. 뽀득뽀득 손을 씻지 않았지만 엄마는 다행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매콤한 떡볶이를 먹고 서울 아제랑 신나게 놀고 나니 엄마가 집에 가야 한다고 했어요. 빨리 집에 가서 코 자야겠어요. 그래야 내일 또 아제랑 신나게 놀 수 있거든요.
“하율아 얼른 일어나.”
“우웅.”
“배한율.”
엄마는 아침에 늘 이렇게 무섭게 깨워요. 안아주고 그럴 수도 있는데. 눈을 비비고 일어났는데 엄마랑 아빠랑 까만 옷을 입고 있어요.
“얼른 일어나. 왕할머니가. 하아.”
엄마가 우는 것을 보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봐요. 자꾸 울음이 나오는데 엄마가 나를 꼭 안아줬어요. 고모할머니가 사다 준 새 옷을 입고 아빠 차를 타고 가는데 다른 날이랑 다르게 엄마랑 아빠랑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요. 나도 그래서 만화를 보여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지금 엄마한테 만화를 보여달라고 하면 혼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신기한 게 왕할머니 집에 갔는데 왕할머니가 나오지 않았어요.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엄마랑 아빠처럼 까만 옷을 입고 있고, 고모할머니도 어제랑 다르게 울고 있었어요. 서울 아제는 나를 보고 꼭 안아줬어요.
“아제. 왕할머니 어딨어?”
“왕할머니 이제 없어.”
“아제. 왕할머니 어디 갔는데?”
서울 아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 등을 두드려줬어요. 그리고 멍뭉이를 보러 밖으로 나가는데 엄마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신나서 멍뭉이를 만지는데 멍뭉이도 이상하게 짖지 않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어요.
“멍뭉아. 멍뭉아 일어나 봐. 멍뭉아.”
“멍뭉이도 오늘 슬픈가 보다.”
“멍뭉이가 왜 슬퍼?”
“왕할머니가 없어서.”
서울 아제는 멍뭉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내 옆에 쪼그려 앉았어요. 그리고 가만히 내 엉덩이를 토닥였어요. 서울 아제는 울지 않았지만 얼굴이 너무 슬퍼 보였어요. 재필이가 내 블록 장난감을 망가뜨린 것처럼요. 그래서 나도 서울 아제를 꼭 안아줬어요.
“하율이 뭐 하고 있어?”
“멍뭉이 보고 있어.”
“그래?”
왕할머니가 멀리 하늘나라로 가고 난지 세 밤을 잤어요. 그런데 하늘나라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왕할머니는 아직도 집에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서울 아제도 나를 꼭 안아주고 서울로 가버렸어요. 그래도 한 가지 딱 좋은 게 있어요. 내가 멍뭉이랑 놀고 있어도 엄마가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어요.
“하율이는 멍뭉이가 좋아?”
“응. 나는 멍뭉이가 좋아.”
“그래?”
엄마는 멍뭉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어요. 나는 놀랐어요. 엄마가 한 번도 멍뭉이의 머리를 만진 적이 없거든요. 엄마는 멍뭉이를 그렇게 한참이나 쓰다듬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리고 나한테 손을 내밀었어요.
“배한율. 들어가자. 맛있는 거 먹자.”
“엄마. 나는 멍뭉이랑 더 놀래.”
“배한율.”
그러면 그렇지. 엄마는 다시 무서운 표정을 지었어요. 나는 멍뭉이한테 손을 흔들고 집으로 들어와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어요. 한참 만화까지 보고 신났는데 아빠가 놀라서 집으로 들어왔어요.
“풍이. 풍이 봤어?”
“풍이가 왜요?”
“아니. 풍이가 움직이지 않아.”
“아까 하율이랑 잘 놀고 있었는데?”
멍뭉이가 움직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ᄈᆞᆯ리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 봤어요. 멍뭉이는 코 자는 것처럼 엎드려 있었어요. 엄마는 아빠랑 빨리 멍뭉이한테 가서 멍뭉이를 흔들었어요. 하지만 아빠가 너무 살살 흔드는 건지 멍뭉이는 잠에서 깨지 않았어요. 엄마도 한참 아빠 옆에 서 있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집으로 들어왔어요.
“엄마 멍뭉이는?”
“멍뭉이가 왕할머니를 되게 좋아했나 보다.”
“어?”
“멍뭉이도 왕할머니 따라서 같이 하늘 나라로 갔네?”
엄마는 웃으면서 나를 꼭 안았어요. 그런데 엄마도 감기에 걸렸는지 코를 훌쩍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엄마의 코를 닦아주려고 엄마의 얼굴을 봤는데 엄마는 눈이 새빨개져서 울고 있었어요.
“하율아. 이제 왕할머니는 없어. 그리고 멍뭉이도 없어. 다 하늘나라 갔어.”
“그럼 하율이도 하늘나라 갈래. 하율이는 왕할머니랑 멍뭉이랑 놀고 싶어.”
“많이. 많이 백 밤도 더 자고 나면 가자. 하율이도 엄마랑 같이 가자.”
백 밤이 너무 많은 밤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왕할머니랑 멍뭉이를 볼 수 있다니 참 다행이에요. 나는 엄마가 등을 토닥여줘서 까무룩 잠이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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