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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종말을 위하여

권정선재 2014. 11. 26. 01:12

문학의 종말을 위하여

[근대문학의 종말] 그리고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

 

1. 근대 문학의 종말

가라타니 고진1980년대 일본 문학이 끝났고, 이를 한국이 이어가고 있다 말한다. 그 이유는 일단 문학의 지위, 문학의 영향력이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텔레비전 중심의 대중문화가 발달하면서 문학이 그 위치를 잃어 가는데, 특히나 오늘날에는 영화를 함께 강의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문학의 위치는 약화되어 있다. 한국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는데, 학생운동의 쇠퇴와 함께 같은 위치의 문학, 소설이라기보다는 시,이 그 위치를 잃어가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은 비난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이미 그 목적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까지 남은 문학의 경우 거의 다 상업적인 것들만 있기 때문에 근대소설의 종말을 고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덧붙인다. 특히나 오늘은 묵독에 의해서 성립되는 사소설의 영역에 다가섰기 때문이다. 특히나 욕구가 아닌 욕망이 우선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학이 설 곳은 점점 더 좁아진다. 실제로 근대문학이 종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목적이 달성되어야 하나 오늘날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이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 이야기한다.

 

2.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

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의 위기는 늘 이야기 되는 소재다. 그리고 이는 2000년대로 넘어오며 종언으로 이행된다. 이러한 담화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문학적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종언은 단순히 문학 자체의 문제만은 아니다. 문학은 다른 그 어떠한 매체에 비해서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사회성의 변화로 인해서 오늘날 문학의 위치 역시 변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소설은 오늘날 가장 위험한 지경에 다다랐는데 그 이유는 그 어떤 문학 장르보다도 더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근대문학을 통해 내면적 주체를 형성시키고 이어서 상상된 공동체 형성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오늘날 다른 매체들이 해주고 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서 이러한 일을 해주는 매체들을 쉽게 찾을 수 있고 더욱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매체를 가지고 있다.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사회적 위치에서의 소설이 가지는 가치 하락 등이 결부되면서 결국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탄생한 예술은 종언 이후의 예술이 될 수밖에 없고 이는 죽음에 대해서 이미 감안하고 탄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예술의 눈을 통해서 보기에 지나친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미학의 가치를 넘어서지 않고 그저 한 순간에 머물면서 그것을 재창조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더 이상 이전만큼 커다란 가치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상업적인 예술과 순수한 예술로 나뉘게 된다. 문학 작품이 그저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하나의 가치를 지닌 상품이 될 수밖에 없어지기에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문학은 자신이 가지고자 했던 순수함을 다시금 되찾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죽음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둔 채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근대문학에게서 크나큰 도움을 받고 있다. 내면을 향한 목소리를 내는 근대문학의 특성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만의 도덕을 키워낼 수 있고 이를 사회적인 것과 결부, 새로운 사회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은 허구를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음을 수용하고 그것을 진정성 있게 다룰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은 우리가 이러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새로운 시대에 종언을 맞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를 오롯이 수행한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맞이하고 그것의 무게에 대해서 진솔히 느끼고 대화를 하기에 오늘날까지도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채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근대문학이 가지고 있는 목적 그 자체를 순수하게 이룩하는 것이다.

문학은 그 어떠한 매체보다도 사회와 닿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어떠한 욕망의 이상향을 소설에게 투영할 수도 있고, 소설은 이전과는 무조건적인 동일화된 방식은 아니지만 이에 대해서 나름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발전 가능성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개개인의 내면과 그를 통해서 만들어진 공동체를 통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 된다면 문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종언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지 않을까? 사회를 바탕으로 두는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가 존재하는 이상 사라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이전에 비해서 그 위치가 작아지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빈도가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

 

3. 결론

그렇다면 과연 근대문학의 종언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가? ‘기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오늘날 소설은 이전과 같은 위치를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시가 그 목적을 잃은 대신 공지영등을 필두로 소설이 그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통해서 사형제 폐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도가니]를 통해서 잊혀진 사회 사건을 고발하기도 한다. 더불어 [한겨례 21]에서는 손바닥 문학상이라는 것을 개최하면서 문학이 사회를 고발할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즉 문학이라는 것이 이전에 비해서 그 가치가 적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대중매체나 영화 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본이 적게 들어가면서 동시에 대중성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사소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만큼 이전처럼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고 하는데 이는 사회의 변화에 대해 무시한 처사이다. 오늘날 개인은 과거의 개인들처럼 커다란 관계를 맺지 않는다. 조금 더 작은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서로의 관계를 맺는 만큼 묵독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사소설의 등장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근대문학의 종언론을 비판하며 그 가치만을 숭배하는 것 역시 옳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비해서 문학의 위치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며 실제로 사람들은 문학을 읽는 일이 그다지 매력적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무리 문학이 사회 고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영화나 대중매체에 비해서 그 파급 효과가 적은 것 역시 사실이다. 문학이 이전보다 위상이 낮아졌으며 대중에게 여전히 매력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던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근대문학, 즉 소설의 몰락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실제로 인간 내부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는 소설들 보다는 조금은 가벼운 단순한 오락 소설이 주로 등장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 상황에서 기존에 문학이 하던 기능이 축소되고 결국에는 소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꿈꾸는 욕망을 넘어서는 것까지 포용할 수 있고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에 대해서 그려내며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수단으로 존재할 수 있기에 그리 쉽게 종말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