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영화와 수다

남성을 벗어나서 스스로 일어서는 여성의 이야기

권정선재 2016. 11. 28. 11:56

남성을 벗어나서 스스로 일어서는 여성의 이야기

[아가씨] 어디로 가시나요?

 

[아가씨]는 여성의 시선에서 그려진 쉽게 만나기 어려운 영화였다. 굳이 그렇게 표현해야 했을까? 하는 성행위는 불편했지만, 적어도 남성에 의한 성적 폭력이 적나라하게 그려지지 않는 것은 좋았다. 특히나 원작 [핑거 스미스]와 비교하면 [아가씨]는 더욱 돋보이는데, [아가씨]에서는 남성은 주변인으로만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세 번의 러브신 역시 두 여성이 직접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사랑니를 갈아주는 에로틱한 장면이나 아가씨와 몸종이 나누는 두 버전의 러브신, 그리고 방울소리가 울리는 배에서의 러브신까지 모두 여성들로만 채워졌다.

그 동안 우리나라 영화는 모조리 남성의 영화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남자 판이었다. [핑거 스미스]를 먼저 봤기에 [아가씨] 역시 남성의 영화일 거라 믿었다. 결국 반전은 있을 것이고, 그 모든 설계는 젠틀맨백작이 한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찬욱감독은 영리하게 이런 예상을 벗어난다. [아가씨]의 모든 설계는 결국 아가씨그러니까 히데코와 몸종 숙희가 그려낸다. 1장의 마지막까지 영화는 백작의 설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뤄지는 것 같았지만, 2장부터 완벽하게 그것을 비틀며 [아가씨]가 여성의 영화라는 것을 확실히 한다.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게 보통이었다. 하다못해 사랑까지도 남성의 방식으로 그려졌다. 여성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낸다는 것은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요원했다. 하지만 [아가씨]에서 히데코숙희는 달랐다. 둘은 서로를 오롯이 바라볼 줄 알며 둘만의 유희도 즐길 줄 알았다. 심지어 히데코가 이모부에게 배운 것이 남녀 간의 성교였음에도 불구하고도 말이다. 두 여성은 자신의 선택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자유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남성 없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여성 캐릭터라니 특이했다.

물론 [아가씨]에 나오는 모든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사사키같은 경우 남편에게 소유된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는 자유를 찾을지도 모르며, 이혼한 남편의 집에서 그의 성욕을 풀어주면서 몸종들에 여왕처럼 군림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여왕으로의 품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몸종들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남성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은총을 받기 고대한다. 스스로의 자유를 찾기 보다는 남성으로 인해서 자유를 찾기를 원하는, 기존 영화 문법에서 고스란히 그리는 수동적인 여성의 캐릭터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히데코숙희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독특한 캐릭터들이다. 서로를 속이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서로를 적으로 두지 않는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로 상대방을 살피고, 그 존재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들이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서로를 도와 그 순간을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핑거 스미스] 속의 두 여인이 결국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르게, [아가씨]히데코숙희는 새로운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더 이상 조선이라는, 그리고 저택이라는 공간이 그들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두 여성의 진한 성애는 불편했지만, 거꾸로 생각을 하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도 없었다. 남성에 의한 강압적으로 성욕의 해소를 위한 관계가 아닌, ‘히데코숙희가 자신들의 몸을 알고 자신들에 맞게 집중해서 맺는 관계였으니까. 특히나 히데코를 괴롭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구슬을 넣은 채로 서로 몸을 맞대어 울리게 하는 장면은 두 여성의 장난으로 보였다. 그 동안 자신을 아프게 하고 조롱하던 그 모든 상황을 깔아뭉개며 깔깔거리는 행동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 설 수 없었지만 둘만의 장소에서 그녀들은 자신들의 여성성을 모두 드러낸다. 스스로의 힘으로 젠더를 벗어난 히데코숙희는 더 이상 여성이 아닌 두 사람으로 그리고 억압받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