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흔한 고백을 하고 난 후의 소녀의 상황
“나 미친 거지?”
“어.”
아정의 물음에 지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정은 울상을 지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세상에 그런 식으로 고백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첫 고백도 완전히 엉망이었는데.”
“그런 거 아예 컨셉 어때?”
“응?”
“엉망 고백.”
“그거 좋다.”
아정이 순간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자 지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게 좋아?”
“아니.”
“하여간 윤아정.”
“속상하니까 그러지.”
아정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니 이원희 걔는 나에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자꾸 나에게서 말을 이끌어내는 거라니?”
“그러게.”
지수는 머리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정은 그 누가 좋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원희는 달랐다. 원희는 아정의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는 사람이었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아정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네가 좋아하기는 하는 모양이야.”
“원희?”
“응.”
지수까지 이렇게 말을 하는 걸 보니 분명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확실해.”
“뭐가?”
“내가 이원희 좋아하는 거.”
“그런 것도 없이 고백을 한 거야?”
“응.”
아정은 아랫입술을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오기 같은 거였어.”
“미친.”
지수는 낮게 욕설을 내뱉은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감정대로라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너는 하여간.”
“그러게.”
아정은 한숨을 토해내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그 사이에 손을 넣었다.
“이제 와서 다시 고백을 무를 수도 없는 거잖아. 조용하게 남들 모르게 한 고백도 아닌 거고.”
“그렇지.”
아니 다른 순간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급식을 먹으면서 그런 식으로 고백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다.
“나 지금 무슨 일본 순정 만화 속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거 같은 기분이야. 그래서 막 고백을 하는.”
“아니.”
지수는 검지를 들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코믹.”
“어?”
“장르 순정 아니야.”
“코믹이야?”
“응. 코믹.”
지수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이자 아정은 더욱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울상을 짓는다고 달라질 건 하나 없었다.
“저기.”
아정이 재빨리 원희를 쫓아갔지만 원희와 지석은 이미 교실을 저 멀리 떠난 후였다. 아정은 한숨을 토해냈다.
“하여간 빨라.”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고맙긴.”
지수는 아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지금 물리가 오버한 거야. 미치지 않고서 지금 수능 앞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게 말이 되냐?”
“우리가 볼 과목은 아니니까.”
“그래도.”
아정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쭉 내밀고 울상을 지었다.
“아니 뭐라도 대답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저렇게 가버리는 게 세상에 어디에 있어?”
“아무리 그래도 오늘 바로 대답을 듣기 바라는 것도 조금 무리 아닌가? 고백을 받은 사람의 입장도 생각을 해줘야 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런가?”
아정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하긴 자신이라도 당황할 거였다. 그런 식으로 고백이라니. 하지만 그래도 뭐라도 말을 더 해줬으면 했다. 괜찮다.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말조차 하지 않고 가버린 거였다.
“너 위지석이랑 친하지?”
“내가?”
“아니야?”
“아니야.”
아정의 말에 지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동창이기는 하지만 친하다고 하기에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다.
“나 걔 번호도 몰라.”
“이제 알잖아.”
“아. 이젠 알지만.”
아정의 말에 말리던 지수는 곧바로 그녀를 노려봤다.
“뭐?”
“분위기 좀 떠봐.”
“싫어.”
지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아정의 사과를 위해서 분위기를 뜨려다가 상대가 단호한 것을 알고 난처한 터였다.
“아니. 너는 그냥 네 감정만 중요하게 생각을 하면 되는 거지. 이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왜 하는 거야?”
“그게 그게 아니잖아.”
“왜?”
“아니.”
아정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이 그렇지. 원희가 나에 대해서 정말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런 거 되게 중요한 거 아니야? 나는 그런 거 생각을 더 해봐야 한다고 믿어. 그래야 뭔가 다음 단계로 나가지.”
“다음 단계?”
아정의 말에 지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아정은 입술을 쭉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윤서정에게 또 물을까?”
“그래. 오빠는 이런 거 잘 알 거야.”
“잘 알기는.”
사과도 그냥 정공으로 하면 된다고 했는데 원희의 이상한 반응만 부른 거였다. 아정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르바이트하는 곳 아는데 갈까?”
“아서라.”
“왜?”
“그거 스토커야.”
“스토커. 맞네. 맞아. 스토커네.”
아정은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냈다. 지수는 그런 아정을 한심한 눈으로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쩐다고 집에서 공부야?”
“왜 시비야.”
서정은 아정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어이가 없는 생명체를 보는 것처럼 보더니 이내 지수를 보고 싱긋 웃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없어요.”
“치킨.”
“닥쳐. 돼지.”
“너나 닥쳐. 누구한테 돼지래.”
서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아정을 노려보고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 아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침대에 누웠다.
“저거 사람 안 돼.”
“너 서정 오빠에게 왜 그래?”
“뭐?”
“아니. 서정 오빠처럼 잘 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갑자기 집에 친구를 데리고 온다고 해도 싫어하지 않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다. 다른 애들 봐? 다들 그렇게 오면 오빠에게 사정사정을 하잖아.”
“얘 뭐래니?”
아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원희 이야기를 하는 순간 지수도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
“응.”
“아니야.”
아정은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이제 어떻게 하지?”
“뭐?”
“아니 같이 공부도 안 하려고 그렇게 그냥 가는 거잖아.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기다려아지.”
“기다려?”
아정은 울상을 지었다. 여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오래 기다린 것 같았다. 그런데 더 기다려야 하다니.
“네가 보기에는 어떨 거 같아?”
“뭐가?”
“원희가 뭐라고 대답을 할 거 같아.”
“거절.”
지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엑스를 그려보였다. 아정은 한숨을 토해내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자신이 생각을 하는 원희의 대답과 지수가 생각하는 원희의 대답이 같으니 더 속이 시끄러웠다.
“아니 솔직히 나 정도면 되게 괜찮지 않아?”
“괜찮지.”
“그런데 왜?”
“전학생에게는 안 괜찮지.”
지수는 검지를 들어 보이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원수잖아.”
“원수는 아니지.”
“맞지.”
지수는 팔짱까지 끼고 검지를 들었다.
“네가 걔 주기로 한 오빠 교복을 그냥 나에게 팔았지. 그리고 걔가 교복이 필요하다는 거 전교생에게 다 알렸지. 게다가 아르바이트비를 준다고 같이 과외를 받자고 했지. 충분한 거 아니야?”
“아니.”
아정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지수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분명히 심각한 잘못을 한 것은 맞았다.
“그 상황에서 전학생이 너를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도 되게 이상한 거 아니야? 너무 과한 거 같은데?”
“그런가?”
아정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네.”
“기다려.”
“못 기다리겠어.”
아정은 베개를 안고 굴렀다. 지수는 그런 아정을 보며 혀를 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왜 그러니?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열병을. 이상하잖아.”
“첫사랑이야.”
“뭐?”
“처음이라고.”
아정의 말에 지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다 입을 막고 더 놀란 표정을 짓다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너 정말!”
“그래!”
“무슨 일이야?”
순간 서정이 벌컥 문을 열자 지수는 음소거로 비명을 질렀다.
“아무 것도 아니니까. 나가!”
아정이 고함을 지르자 서정은 미간을 모았다.
“아니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지.”
“야동이라도 보면 어쩌려고.”
“그래. 뭐.”
서정이 그대로 나가자 지수는 멍하니 있다가 아정의 팔을 아프게 때렸다. 아정은 팔을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첫사랑이라고.”
지수는 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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