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장
“오랜만이다.”
“그러게.”
유정은 조심스럽게 서울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내가 미워?‘
“미울 게 있어?”
솔직한 감정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제 유정을 미워하거나 그런 마음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뭐라고 하기엔 이제 의미가 없지.”
“의미.”
서울의 말에 유정은 가만히 의미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졌다.
“아. 나 이민 가.”
“어?”
“너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만나게 된 사람이 있어서.”
“갑자기.”
하나도 아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정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웠다.
“미안해.”
“아니야.”
유정이 사과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언제 가?”
“내일.”
“어?”
“그렇게 됐어.”
유정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는 말. 신기하면서도 미웠다.
“그래?”
이 말만 나왔다.
“그렇구나.”
“축하는 안 해줘?”
“해야지.”
서울은 부러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자신은 이런 순간에도 감정 하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걸까?
“축하해. 진심이야.”
“고마워.”
괜히 그러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용준도 이러더니. 유정도 이렇게 쉽게 자신을 떠나는 거였다.
“나 잘못 살았나봐.”
“어?”
“다들.”
“또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아니야.”
굳이 유정에게 하나하나 다 말을 할 것은 없으니까. 서울은 유정의 눈을 보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도 마찬가지인 걸.”
“다르지.”
“안 달라.”
유정은 손을 내밀어서 조심스럽게 서울의 손을 잡았다. 서울도 그 손을 빼지 않게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든 놀러와. 가서 주소 보낼게.”
“응.”
서울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이 그대로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때 친구였던. 그리고 지금 이런 소식을 주고 받을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그런 온기가 아주 조금은 남아있었다.
“다 내 탓이지.”
“무슨.”
“사실이잖아요.”
“아닙니다.”
서울의 말에 세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서울의 팔을 가만히 문지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서울 씨가 미리 안다고 해서 달라질 일들이 아닌데. 왜 한서울 씨가 그렇게 미안하게 생각을 해요?”
“다 내 탓인 거 같아서.”
“무슨.”
서울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자신의 문제가 아닌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자신의 문제인 것 같았다.
“한서울 씨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나는 안 떠날 건데.”
“뭐래?”
“정말?”
별 것 아닌 거 같은 세인의 장난스러운 말이 오히려 마음에 위안이 되는 순간이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이죠?”
“당연하죠.”
서울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말이라고 하지만 이 말이라는 게 정말로 큰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자신이 지금 지친 이 순간에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는 것. 오직 세인이기에 가능했다.
“집이 왜 이래?”
“내 거 팔았어.”
“뭐?”
춘자의 말에 서울의 얼굴이 굳었다.
“내 거 내가 파는 거야.”
“그래?”
“나도 돈이 있어야지!”
서울이 뭐라고 말을 하지 않자 춘자는 오히려 다급했는지 악다구니를 썼다. 그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질린다.”
“마음대로 말해. 나는 겁 안 나.”
“응.”
서울은 미소를 지은 채 머리를 뒤로 넘겼다.
“다 끝을 내면 되겠네.”
“마음대로 해.”
아마 춘자는 지금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 집.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의미가 없었다.
“내가 그러면 겁을 먹을 줄 아니?”
“응.”
서울의 말에 춘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왜?”
“뭐?”
“너는 너를 너무 대단하게 보는 거 같아.”
춘자의 날카로운 목소리. 저기에 움츠를 이유가 하나 없는데 마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네가 아무리 그렇게 잘난 척 하더라도. 네가 나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딸. 이미 딸은 엄마에게 너무나도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는 것 말이야.”
“아니.”
서울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야지.”
“그건 두고 봐야지.”
서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춘자가 스스로 달라지지 않을 거였다. 결국 다른 도움이 필요한 거였다.
“내가 보여줄게.”
“그래.”
춘자는 씩 웃었다. 그 서늘한 미소에 서울은 침을 삼켰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미소였다.
“그럼 세인이랑 살면 되겠네.”
“아니요.”
은아의 제안에 서울은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거였다. 그러려고 이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제가 왜요?”
“사귀잖아.”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고요.”
“해야지.”
은아의 간단한 말에 서울은 어색하게 웃었다.
“엄마.”
“왜?”
세인이 볼을 부풀리자 은아는 입술을 내밀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들이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이야. 뭐. 네가 보여주고 싶어서 보여준 거랑은 약간 다른 거 같기는 하지만.”
“이건 다르죠. 제가 한 거 아니잖아.”
“그래도.”
은아의 말이 어떤 의미이고,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아직 이건 다소 성급한 이야기였다.
“그저 어머니에게 겁만 주면 돼요.”
“아닐 걸.”
은아는 꽤나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아직 한서울 씨나, 한서울 씨의 가족, 그러니까 어머니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이 정도로 끝이 나지는 않을 거야.”
“아니.”
“맞아요.”
세인이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서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인은 그런 서울의 손을 꽉 잡아줬다.
“더 생각해야 해요.”
“지금 돈 얼마 안 남아있는 건 알지?”
“네? 네.”
미리 부탁한 서류.
“어떤 생각할 것들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런데 지금 확인을 해보니까. 자기도 알다시피. 그다지 큰 돈은 아니야.”
“그러네요.”
“여기.”
은아는 서류를 손으로 가리켰다. 꽤나 많은 대출. 이미 기준을 넘어선 대출. 이러면서도 돈이 없다는 거였다.
“지금 정부 기조로는 집값. 떨어질 거야. 그러면 이 빚. 지금 당장 갚아야 하는 게 늘어날 거야.”
“팔아주세요.”
“괜찮아요.”
세인은 미간을 모았다.
“엄마 겁을 주지 말고.”
“현실이야.”
“괜찮아요.”
서울은 세인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래요.”
서울의 말에 은아는 입술을 내밀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빌렸어.”
“그러게.”
그럴 거 같기는 했는데 정말 이럴 줄 몰랐다.
“말도 안 돼.”
“그러게.”
세인은 그저 서울의 말에 동의하면서 손을 꽉 잡았다. 서울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나도 돈도 있고. 동생도 친구 집에 있으니까.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돈은 그다지 급하지 않아요.”
“그럼 이 집 어머니에게 돈 드리는 걸로 하죠.”
“네?”
“나중에 관계가 다시 맺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일단 여기에서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하는 거니까.”
“그렇겠네요.”
은아의 말이 옳았다. 춘자라면 당연히 그럴 거였다. 그가 여기에서 그냥 끝을 낼 리가 없었다.
“생각 좀 더 해보고.”
“당연히 그래야지.”
은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판다고 해도 나도 말리려고 했어.”
“고맙습니다.”
“내가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은아는 이미 자신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는 중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도와주는 건지 신기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연히 해줘야지. 내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인데.”
신기한 말이었다.
“그럼 둘은 데이트 잘 하고.”
“네.”
식사라도 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은아가 먼저 손을 흔들어줬다. 지금 세인의 반응을 보니 이 가족에게는 이게 당연한 일인 모양이었다. 신기한 사람들이었다.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대단했다. 세인의 반응을 보니 아마 그 역시도 너무나도 익숙한 모양새였다. 자신과 다른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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