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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송이 - [일곱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8. 1. 4. 20:35
 




-7번째 눈꽃송이-




“선배. 뭐해요?”


“사진첩 보고 있어.”


사진속의 저는 너무나도 행복한 모습들입니다.


“예쁘다.”


“그럼요? 누구 여자친구인데요.”


“그렇지?”

조금씩 느껴지고 있습니다. 저의 몸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


“우리 다시 바다 한 번 꼭 가자.”


“바다요?”


“응.”

“좋아요. 그럼 이번에는 언제 갈까요?”


“내일이라도 가자.”


“회사는요?”


“아, 회사 가야 하는 구나.”

“선배도 참.”

민성이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짓습니다.


“커피 뽑아올까요?”

“응.”


“금방 올게요.”

“그래.”

사실 회사에는 사표를 냈습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삶. 회사 일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하늘에 목숨이라도 구걸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니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기 전에 더 많은 기억을 만들고 싶습니다.


“선배.”


“벌써 왔네.”


“그럼요. 우리 선배 커피 마시고 싶다는데.”


저는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토록 향긋하던 커피 향이 이제 조금씩 역하게 느껴집니다.


“내일은 우리 단 둘이 가자.”


“진짜요?”


“응.”

민성이의 미소를 보니 정말 미안합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너도 하루 쯤은 시간 낼 수 있지?”


“이번 달 테마 기획이 저거든요. 겨울 바다 사진 찍으러 가면 되죠.”


“그래. 그러면 되겠다.”

언제나 저를 위해 생각해주는 아이. 이제 놔줘야 겠죠?




“너 민성이랑 바다 가기로 했다면서?”

집으로 가자마자 나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습니다.


“응.”

“오, 단 둘이?”


“가서 헤어지자고 말할 거야.”


“!”

나나의 얼굴이 굳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이제 얼마 못 견딜 거야.”


“그래서?”

나나는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너 왜 화를 내고 그러냐?”

“민성이가 불쌍하지도 않니?”

“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걔가 왜 불쌍하니?”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진다면,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인데!”


“그래서 헤어진다고 말한다잖아!”

나나가 악을 쓰니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왜 네가 그래!”

“왜 사실을 말 못하니?”

“네가 나라면 말할 수 있겠니?”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나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왜 말 못하니? 나라면 말 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왜 말을 못 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 힘들게 할 수는 없잖아. 멀어서 비울 수만 있다면, 나는 멀리 떠나버릴 거야.”


“하.”


나나는 자리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나는 왜 너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거니?”


“나나야.”

“나는 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세상이 망한 듯이.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차 조심하고.”

나나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애써 그 눈빛을 피했습니다.


“가자.”


“네.”

민성이는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죠?




“선배 보여요?”

“어?”

멍하니, 어떻게 하면 헤어지자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민성이의 환호성이 들립니다.


“왜?”

“선배, 바다에요!”


“바다?”


저 멀리 바다가 푸르르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지난 번 보다 더 깊은 겨울로 들어선 바다는 더욱 싱그러웠습니다.


“예쁘다.”


“그렇죠?”

“응.”

이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습니다.


“선배 뭐해요? 이제 내려야죠.”

“어? 어.”

민성이 고개를 갸웃합니다.


“선배 이상해요.”


“좋아서 그래. 좋아서.”


“진짜요?”


하아,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더 이상 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더 잔인한 일 같습니다. 반드시 헤어져아만 합니다.




“선배 뭐해요? 안 먹고.”


“어, 먹고 있어.”

“어서요. 고기 다 타잖아요.”


선재가 맛있게 잰 양념 갈비, 분명히 맛있는데 먹을 수가 없습니다.


“저기.”


“네?”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이제 헤어지자는 말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 헤어져”


저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민성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서, 선배”


민성이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거짓말이죠?” 


마치 그렇게 말해 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아니.” 


그러나 저는 냉정히 말해버렸습니다. 단호하게,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죠.


“우리 헤어지자”


저는 차마 민성이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까 겁이 납니다. 헤어지지 못 할까봐 겁이 납니다.


“왜, 왜요? 선배 나 안 좋아했어요?”


민성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게 물었습니다. 정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 밉습니다.


“지겨워.” 


저는 애써 냉정하게 말을 내뱉었습니다.


“내가 지겨워요?”


다시 눈물이 흐를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민성이가 저를 깨끗이 잊을 수 있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저 때문에 아프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사라지고 나서 민성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민성이가 더 이상 힘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너랑 사랑하면서 매일 조마조마했어.”


그렇게 저는 진실은 말하지도 못한 채 울먹이는 민성이를 두고 서울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더 이상 민성이와 같은 장소에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그를 다시 붙잡고 싶어질 게 분명하니 말이죠.




“하.” 


그렇게 선배는 끝까지 저에게 비밀을 지켰습니다.


“고마웠어요.” 


저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한 사람. 정민아.




“헤어졌어.” 


“괜찮아?” 


“나나야. 내가 잘 한걸까?”


민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제 가슴에서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럼 잘 하는 거지. 네 선택인데. 네가 한 건데.”


저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민아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나나야.” 


“민아야. 이제 아프지마.”


“나나야. 나 민성이가 좋아.”


“응. 알아. 울지마.”


민아는 저에게 하소연하듯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아.” 


차였습니다. 민아 선배가 이럴 것 같기는 했습니다. 민아 선배의 성격상 진실을 밝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미리 예상은 했습니다.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잘 넘어 가는 듯 했는데 말이죠.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진실로 제가 사랑한 사람입니다. 제가 앞으로 삶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오늘  저를 차고 떠나버렸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고 가장 아프고 가장 힘든 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녀를 붙잡을 겁니다. 어떻게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