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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송이 - [여덟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8. 1. 5. 07:07
 

-8번째 눈꽃송이-




“무슨 일이세요?”


“그게 말이야. 사표 수리가 안 되었어.”


“네?”


부장님이 미안한 듯 바라보니, 저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요?”

“이번 달까지 하기로 한, 중년배우 특집. 다른 기자들이 아무도 안 하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그거까지만 끝내고 사퇴를 다시 내주면 안 될까?”

“네.”

저를 아직 필요해 하는 곳이 남아 있군요.


“그래, 고마워.”


“고맙긴요.”


“내가 이 은혜 반드시 갚지.”

“네.”

그게 올 수나 있는 시간일까요?




“선배.”

민성이가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를 외면합니다.


“이유라도 말해줘야죠!”


“지겹다고 이미 말했을 텐데.”

“선배.”


“지겨워. 그게 다야.”

“하아.”

민성이가 한숨을 내쉽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알았어요. 하지만요. 저 절대로 포기 안 해요.”

“그러시든지.”

이 아이 어떻게 하면 좋지요?




“그래서 계속 다니기로 한 거야?”


“당분간.”


“그렇구나.”

나나는 요즘 샌드위치 만들기에 재미가 들렸습니다. 저 역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신선한 샌드위치를 먹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너 진짜 가게 안 내볼래?”

“가게?”

나나가 손사래를 칩니다.


“내 주제에 가게는 무슨.”

“왜?”


제가 먹어본 샌드위치 중에 나나의 샌드위치가 단연 최고입니다.


“분명 손님들이 줄을 설 거야.”

“빚쟁이가 줄을 안 서면 다행이겠다.”

“에? 진짜다.”

“비행기 그만 태우세요. 너무 높으면 떨어질 때 다쳐요.”

이렇게 즐거운 순간 갑자기 그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근데, 너 요즘 병원 잘 안 가는 것 같더라.”


“어?”

나나의 말에 뜨끔합니다. 사실 죽음이 확실히 정해지고 나서는 병원 가는 날짜를 어기기 일수이기 때문이죠.


“너 그러다가 큰일나.”

“괜찮아. 아직은.”

조심스럽게 저의 오른 손을 왼쪽 가슴에 얹어보았습니다. 잘 뛰고 있습니다.


“멀쩡해.”

“그래도.”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알았다. 하지만, 아프면 바로 병원 가야해.”

“응.”

역시 저를 챙겨주는 건 나나뿐입니다.




“얼마나 있을 거야?”

“글쎄다.”

나나가 고개를 갸웃합니다.


“새로운 일거리가 아무래도, 국토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거니까.”


다행입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나에게 딱 어울리는 일입니다.


“그래?”

“미안.”

“미안하긴.”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올 때 선물 사 와.”


“응.”

나나마저 잠시 동안이나마 저를 떠나니, 가슴이 텅 빈 것 같습니다.


“하아.”


그래도,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맞겠죠?




“하아.”


한 밤이 분명합니다. 아들이 밤늦게까지 영화를 보느라 시끄러운 옆집이 조용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갑자기 심장이 아파옵니다.


“하아.”


손을 뻗어 진통제를 꺼내는데 한 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

심장이 아파옵니다.




“휴우.”

얼마나 지났을까요? 다행히 고통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내일은 정말로 병원을 가봐야 할 모양입니다.




“선배.”


“제발.”

민성이 녀석에게 더 이상 모진 말을 하기도 지쳤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질리지도 않는 지, 계속 따라 붙습니다.


“부탁이에요.”

“나도 부탁이야.”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선배.”


“너 자꾸 왜 이러니?”

“저 절대로 선배 포기 안 한다고 했죠!”

“포기 하든 안 하든, 그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야. 어서 돌아가.”

“선배!”


거의 매일같이 있는 일입니다. 민성이는 항상 저의 집을 따라옵니다. 그리고 저와 매일 실랑이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서 가.”


“선배!”

“경찰에 신고할 거야.”


“하아.”


그제야 민성이는 발걸음을 돌립니다. 눈물이 흐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참아야 합니다. 혹시 민성이가 돌아볼 수도 있으니까요.


“흐읍.”

하지만 눈물이 터져버립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쪼그려 앉았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서글픕니다.




오늘도입니다. 선배는 저를 또 문전박대 했습니다. 아직까지 자신의 병을 숨기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혼자 아파할 지, 저는 또 가슴이 아려옵니다. 저에게 기대도 되는데, 그 정도는 감싸 안아줄 자신이 있는 데 말이죠. 하지만 선배는, 항상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아.”

이 겨울이 더 쌀쌀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