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이 떴다! Episode. 1 - 빼빼로 데이
네 번째 이야기
17살의 빼빼로 데이.
“내일 빼빼로 데이인데 어쩌지?”
“뭘 어떻게 해?”
단짝인 유진이 입니다.
“엄마가 용돈을 안 준다잖아.”
“뭐?”
마스카라를 칠하던 유진이가 저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왜? 너 그거 없으면 현창이한테 어떻게 하게?”
“그러니까 미치겠어.”
“엄마는 왜 안 주신다는대?”
“지난 주에 용돈을 받았잖아.”
“그거 다 썼어? 너 한 달에 10만원 씩 받잖아.”
“뭐.”
물론, 제 씀씀이가 헤프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도 요즘 10대가 돈을 쓸 곳이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요. 솔직히 10대가 남자 친구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르바이트는 절대로 못 하게 하죠. 그렇다고 용돈이 풍족한 편도 아니라고요. 옷도 사야 하고, 신발도 사야 하고, 화장품도 사야 하는 데요. 무슨 학생이 공부를 안 하냐고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제가 아무리 공부를 못 하게 생겼더라도, 이래 뵈도 전교에서 손에 꼽히는 성적에 든다고요. 그렇지만 엄마는 물론 제 성적에 만족을 하지 않으신답니다. 언제나 더 높은 성적을 요구하시죠. 이게 10대의 괴로움이랍니다.
“그걸 누구 코에 붙이냐? 주말마다 현창이 만날 때마다 현창이에게 돈을 내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 걔라고 땅 파서 돈 나오는 거 아니잖아.”
“뭐.”
유진이가 어깨를 으쓱합니다.
“그러면 내일 어쩔 거야? 아무 것도 안 주면, 현창이가 섭섭해 하지 않을까?”
“그래서 고민이야.”
“네가 만들어.”
“됐어.”
제 요리 실력은 제가 더 잘 압니다. 학교 가사 실습 시간에 도넛 튀기다가 불 낼 뻔 한 애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거기다가 겨우 완성한 도넛을 먹은 제 친구의 말을 들으니, 차라리 불을 내기 잘 했다고 하더군요. 말 다 했죠?
“단기 알바 없을까?”
“꿈 깨셔.”
유진이가 고개를 젓습니다. 하여간 요 얄미운 것. 얘는 저보다 공부도 못하는데 용돈도 더 많습니다.
“그러면 유진아, 네가 돈 좀 빌려주라.”
“내가 돈이 어디 있냐?”
“이 앙큼아.”
저는 가볍게 유진이를 흘겨 보았습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뭐, 그냥 빼빼로나 사다 주지. 나도 만드는데는 소질 없잖아.”
“미치겠다.”
정말 막막합니다.
“이모에게 졸라 봐.”
“됐어.”
이모에게 조르다니요? 우리 이모가 얼마나 입이 가벼운 지 유진이는 모르니까 하는 말입니다. 우리 이모가 안다면 우리 엄마가 아는 건 시간 문제, 아니 정말 초 단위를 다루는 문제입니다. 말을 꺼내는 즉시 귀에 들어갈 걸요?
“그냥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건 어때?”
“어떻게 그래?”
“빼뺴로 데이에 꼭 빼빼로 먹으라는 법 있어?”
유진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10대입니다. 빼빼로 데이 같은 우리만의 날은 정말 제대로 챙겨줘야 한다고요.
“현창이가 실망을 할 거라니까. 현창이가 내 생일에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해줬는데 절대로 안 돼.”
“뭐.”
유진이가 저의 얼굴을 봅니다. 왜 쳐다보는, 아차! 유진이에게는 현창이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뭐, 사실 유진이가 알아 봤자 변할 것도 없지만 말이니다.
“너 왜 나에게 말 안 했어?”
“말 할 이유가 있나?”
“
“그냥.”
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선물 받은 거 일일이 너에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유진이의 서운한 표정을 보니 조금은 미안한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현창이와 커플 속옷을 맞추었다는 이야기가 유진이의 입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 지 상상만 해도. 으유. 절대로 안 됩니다. 비밀입니다. 분명히 입이 꽤나 가벼운 유진이가 듣는다면 우리 학교에 소문이 날 일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건 절대로 말려야만 합니다.
“뭐 받았어?”
“어?”
시작입니다. 유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 모른 척 하기에는 굉장히 벅차지만 모르는 척 해야만 합니다.
“비밀이야.”
“치, 그러지 말고. 응? 응?”
“미안.”
저는 황급히 파우치를 챙겼습니다. 현창이가 같이 하교를 하자고 했는데, 지금 너무 오랫동안 꾸물대고 있었습니다. 분명 현창이는 심심한 나머지 돌멩이를 차면서 놀고 있을 겁니다.
“나 먼저 갈게.”
“
휴, 겨우 유진이를 두고 도망쳤습니다. 분명히 나중에 유진이가 투덜거리면서 한 소리를 하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입니다. 일단 지금은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아, 미안.”
제 애인인
“미안, 우리 자기한테 더 예쁘게 보이려고 했지.”
“그래?”
“응.”
이 말 한마디에 기분이 딱 풀려서 해맑게 웃는 제 애인 너무 귀엽지 않나요? 뭐, 남자라는 동물이 원래 단순하니까, 이런 단세포적인 행동도 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답니다. 그래도 저 하나만 사랑하고 아껴주니까 너무너무 좋습니다. 제 친구들은 남친이 양다리를 걸쳐서 깨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거든요. 하지만 아직까지 현창이는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참 다행이지요?
“우리 오늘 뭐 할 거야?”
“짜잔!”
현창이가 주머니에서 영화 티켓 두 장을 꺼냅니다.
“이게 왠 거야?”
“우리 형이 줬어.”
“아.”
맞습니다. 현창이네 형은 CGV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깜빡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CGV라는 브랜드보다는 프리머스 시네마를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 공짜 영화표인데 영화관을 가릴 필요는 없겠죠?
“그래서 영화 보여주게?”
“응.”
자, 잠깐 기분 좋게 따라가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용돈이 하나도 없거든요. 적어도 현창이가 영화를 보여준다면 제가 하다못해서 음료수라도 사야 하는데, 이런, 정말 돈이 없습니다.
“아, 나 오늘 약속 있다”
“약속?”
“응.”
현창이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표현이 역력합니다.
“꼭 가야 하는 거야? 이거 유효 기간이 안 남아서 오늘이 아니면 못 보는 거야. 우리 요즘에 공부한다고 서로 같이 데이트 한지도 오래 됐잖아. 그렇게 급한 게 아니라면, 우리 그냥 같이 영화 보러 가자.”
“정말 미안.”
진짜로 미안하지만, 여자의 자존심에 돈이 없어서 못 간다는 말은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미안하지만 정말 같이 데이트를 하고 싶지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데이트를 못 하는 것은 지금 당장 돈이 없는 것도 이유겠지만, 내일 빼빼로를 주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미안.”
“그래.”
현창이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니 같이 영화를 보러 가고 싶지만 안 됩니다. 절대로.
“그럼 나 먼저 갈게. 내일 보자.”
“내일은 같이 갈 수 있는 거야?”
“응.”
어서 집에 가서 엄마를 졸라봐야 겠습니다.
“응? 엄마, 엄마.”
“안 돼.”
우리 엄마,
“엄마, 다음 달 용돈에서 까. 응?”
“다음 달에는 크리스마스 있다고 1월 거 깔 거니?”
나 참,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은 없습니다. 물론 크리스마스 때도 꽤나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요?
“엄마.”
“절대 안 돼!”
“치.”
엄마에게 말을 더 해봤자 변할 것은 하나도 없을 거 같습니다. 괜히 제 기분만 상하지요. 엄마도 정말 너무합니다.
“됐어. 나도 치사해서 엄마한테는 용돈 안 받는다. 대신 성적 떨어져도 용돈 깐다 소리 하지 마. 성적 올라도 안 올려주면서.”
“
저는 있는 힘껏 발을 구르고 저의 방으로 갔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보지만 딱히 해답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내일은 그래도 연인의 날이니까 현창이와 데이트를 해야 할 텐데, 내일 마저도 데이트를 하지 않으면 정말 현창이에게 미안하잖아요. 이제 곧 시험기간이라서 데이트를 못 할 텐데 말이죠.
“휴우, 정말 엄마는 내 마음을 모른다니까.”
‘똑똑’
그 순간 제 방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혹시 엄마가? 저는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자 서 있는 사람은 우리 할머니 입니다.
“할머니 왜요?”
“나 좀 들어가도 돼니?”
“네.”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섭니다. 우리 할머니는 정말 70살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습니다. 저도 나중에 나이가 먹으면 우리 할머니처럼 늙고 싶습니다. 물론 그 전에 젊음을 실컷 누리고 말이죠.
“왜?”
“돈이 왜 필요한 지 할머니에게 말할 수 있겠니?”
“아침에도 말했잖아요.”
저는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할머니도 나 남자 친구 있는 거 알죠?”
“그래. 현창이.”
“내일이 남자 친구에게 빼빼로 주는 날인데, 나는 아무 것도 안 주기 그렇잖아요.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엄마는 쪼잔하게 그런 걸 안 준다니까요.”
“그거 안 주면 안 되는 거니?”
“그럼요.”
역시 어른들은 대화를 하기 어렵습니다. 빼빼로 데이가 얼마나 중요한 기념일인지 전혀 모르고 있으시다니까요.
“그거 안 주면 현창이랑 헤어질 지도 몰라. 나 그런 거는 원하지 않아요.”
“그래.”
할머니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으십니다. 그리고 나온 할머니의 손에는, 어라? 돈입니다.
“이거 쓰거라.”
“이거 할머니 용돈이잖아요?”
“내가 돈 쓸 곳이 어디있어? 네가 필요하면 주려고 가지고 있었어. 얼마 안 되지만 그 과자 사는 데는 보탤 수 있을 거다.”
“우와.”
할머니가 준 돈을 받아보니 꽤나 두툼합니다.
“뭐, 이렇게 많이 주세요?”
“다 써도 돼.”
대충 봐도 10만원은 훌쩍 넘을 거 같습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할미가 도로 가져갈까?”
“그, 그건 아니고요.”
“그래.”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할머니는 방에 갈 테니까. 그걸로 내일 현창이랑 데이트 어떻게 할 지 잘 생각을 해. 알았지? 할머니는 현창이라는 애가 참 싹싹하고 예뻐서 마음에 드니까, 헤어지지는 말고 말이다.”
“네.”
‘탁’
방문이 닫히자 마자 저는 돈을 세 보았습니다. 한 장, 두 장. 우와, 자그마치 23장입니다. 23만원이라는 돈이 갑자기 손에 떡하니 떨어지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꽤나 부자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요?
“역시 할머니는 신세대야.”
내일 데이트는 걱정 없습니다.
“현창아.”
“아라야.”
서로 가방에서 꺼내온 옷을 입으니 고등학생이라도 조금 자유로운 기분입니다.
“우리 오늘 달콤한 데이트를 즐겨 볼까?”
“그래. 일단 우리 배고프니까 밥부터 먹자.”
“그래.”
저는 자연스럽게 현창이에게 팔짱을 꼈습니다. 현창이 역시 얼굴을 붉히면서도 빼지 않는 것을 보니, 좋아하는 듯 합니다.
“저녁은 내가 살게.”
“왜? 나도 돈 있어.”
“아니야.”
할머니가 준 돈이 있는데 현창이에게 얻어 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오늘 할머니가 용돈 주셨어. 그러니까 마음껏 먹어도 돼.”
“할머니가?”
“응. 23만원이나 주셨어. 오늘이 연인들에게 중요한 날이라고 했더니, 너랑 데이트 하라고 주셨어. 잘 됐지?”
“그럼 내가 살게.”
“어?”
이건 무슨 말이죠?
“왜? 할머니가 우리 쓰라고 주신 돈이라니까.”
“그래도.”
현창이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저를 바라봅니다. 왜 저러는 거죠?
“할머니께서 그 돈을 모으시느라 시간도 좀 걸리셨을 거 아니야. 그런 돈 쓰기 좀 그렇잖아. 나도 그 동안 용돈 아껴서 돈 좀 있거든. 우리 오늘 저녁 먹고, 간단하게 데이트할 돈은 있어.”
“하, 하지만.”
“괜찮아.”
현창이가 미소를 짓습니다.
“할머니께서 내게 얼마나 잘 해주시는데, 그 돈 쓰기도 좀 그래. 뭐, 네가 정 쓰고 싶다고 해도 오늘은 쓰지 말자. 그냥 그 돈은 집에 고스란히 가져가서 할머니 도로 드려. 그러면 할머니도 더 좋아하실 거야.”
이거 보세요. 제 남자 친구는 마음이 완전 넓다니까요. 정말 무지하게 착합니다.
“그, 그래도 이와 가져 온 건대?”
“아라야.”
현창이가 가만히 고개를 젓습니다.
“나 그 돈 쓰고 싶지 않아.”
“그래.”
저는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대신 네가 오늘 제대로 쏘는 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현창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습니다.
“오늘 완전 감동이었어.”
“데이트 코스가 좋아서?”
“아니.”
저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 현창이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네 마음이 따뜻한 거 알았으니까.”
“그걸 이제 알았어?”
“그러게.”
저는 현창이를 꼭 안았습니다.
“나 네 여자 친구라서 너무 행복해.”
“나도 네 남자 친구라서 너무 행복해.”
“항상 내 곁에서 남자 친구로 있으면서 나 지켜줄 거지?”
“물론이지.”
저는 현창이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현창이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을까?”
“너보다 한 일주일 먼저?”
“헤헤.”
“푸하하.”
현창이가 저의 손을 잡았습니다.
“집에 들어가.”
“들어가기 싫다.”
“늦었잖아.”
“뭐가 늦어.”
뭐, 사실 조금 늦은 시간이기는 합니다.
“이제 당분간은 데이트 못 하겠네.”
“모의고사도 있고 곧 기말고사이니까.”
“아쉽다.”
“학교에서 매일 보잖아.”
“그래도.”
현창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습니다. 아 제가 반한 게 바로 저 미소입니다. 저 미소만 지어주면 우울했던 기억. 그런 게 다 싹 지워집니다. 정말 예쁜 미소를 지니지 않았어요? 제 남자 친구 자랑이 너무 심한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좋으니까 말이죠. 누구라도 좋아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가기 싫다.”
“킥.”
집 앞에서 자꾸 망설이자 현창이가 미소를 짓습니다.
“들어가야지.”
“그래도.”
저는 현창이의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우리 사귄 지 얼마나 됐지?”
“한 200일 되가나?”
“그래?”
저는 생긋 웃었습니다.
“현창아 이리 와 봐.”
“응?”
“오늘은 또 다른 기념일이야.”
고개를 갸웃하며 저에게 다가온 현창이에게 입술을 맞추었습니다.
‘
“오늘은 첫 키스 기념일이다.”
행복한 빼빼로 데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참, 용돈은 조금만 제가 빼고 할머니를 드려도 되겠죠? 너무 행복한 하루입니다.
'☆ 소설 > 단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 소설] 아픈 남자 아픈 여자 (0) | 2010.01.01 |
---|---|
[단편 소설] 거울 속 킬러 (0) | 2010.01.01 |
그녀들이 떴다! Episode.1 [빼빼로 데이] - [34살의 빼빼로 데이] (0) | 2008.11.12 |
그녀들이 떴다! Episode.1 [빼빼로 데이] - [44살의 빼빼로 데이] (0) | 2008.11.11 |
그녀들이 떴다! Episode.1 [빼빼로 데이] - [70살의 빼빼로 데이] (0) | 2008.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