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잉’
도대체 몇 시인지도 모를 시간이었다. 미간을 모으며 잠시 몸을 뒤척이다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고민했다. 평일이라면 딱히 나에게 문자를 할 사람이 없었고, 주말이라면 더더욱 딱히 문자를 할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그 어떤 할 일 없는 인간이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마구 퍼부으려는 순간,
‘위잉.’
다시 한 번 울리는 진동을 들으며 이것이 문자메시지로 인한 진동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걸려온 불쾌한 전화로 인해 울리는 진동으로 인한 것을 깨달았다.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가고 애써 잠에서 깬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천하태평이군.”
“네?”
난생 처음 듣는, 그리고 나에게 무언가 적대적인 기운을 가지고 있는 그 목소리에 나는 저절로 잠에서 번쩍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미지의 상대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이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던 모양이군.”
“아니, 그건 사실이지만.”
머리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러한 목소리나 이러한 어투를 쓰는 사람은 나의 주위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다소 짜증이 섞인 어조로 미지의 상대에게 신경질을 냈다. 도대체 이 사내는 누구이기에 타인의 이 즐거운 아침을 방해하고 있는 것일까?
“쿡.”
그 순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온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이 웃음은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애인이 나를 찰 때 이유로 댔던, 그 웃음소리가 분명했다. 듣는 사람의 기분을 완전히 망치는 능력이 있다고 그녀가 경고했던 그 웃음소리를 지금 나와 통화하고 있는 미지의 인물이 내고 있었다. 그리고 혹시 나의 친구들 중 누군가가 나의 흉내를 내서 이러한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애초에 나에게 친구는 적고, 그 중 이렇게 할 일이 없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과연 누구일까 꽤나 궁금한 모양이군.”
상대방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잔뜩 긴장을 한 이쪽의 상황과 다르게 말투 자체에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자, 가장 모르고 있는 그러한 사람이지.”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제멋대로 지껄였다. 그의 말은 가만히 나의 머리에서 둥둥 떠다니며 나의 모든 기억을 섞고 있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장난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군요.”
“장난이라, 도대체 무엇이 장난이라고 말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 지금 이 상황에서 과연 어떤 부분이 장난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일까? 장난인 부분을 굳이 찾고자 한다면 그저 누군가 이른 아침에 전화를 했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맨 처음에는 과연 내가 제대로 전화를 한 것일까 긴장을 했는데 다행히 내가 전화를 해야 할 상대에게 제대로 전화를 한 모양이군. 나의 목소리를 듣고 그런 반응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야.”
상대방에게 지금 이 전화는 우연한 것으로 걸린 전화가 아니라 확실하고도 분명한 의사가 있는 전화였다.
“나에게 전화를 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상대방은 이제야 다소 흡족하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그 쪽의 직업이 소설가라고 들었어. 그것도 차례차례 아귀를 맞추어 나가는 것을 즐기는 추리소설가.”
“어디서 들은 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군요.”
한 때 분명히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곧 그러한 종류의 것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그 꿈을 사뿐히 접어두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 꿈을 위해서 어떠한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미지의 인물은 이 사실이 다소 의외라는 느낌을 가득 담아서 대꾸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 정도라면 도플갱어라는 단어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겠지?”
“도플갱어?”
세상에 닮은 사람이 셋 있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이미 돌고 돌아서 더 이상 관심조차도 가지 않는 미더운 이야기였다.
“그러한 이야기를 왜 하는 겁니까?”
“내가 네 도플갱어니까.”
몸이 가늘게 굳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느껴졌던 그러한 위화감이나 여타의 것들이 정말 그의 말대로 내가 그와 같은 존재라서 그러한 것이었을까?
“그러한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전화하고 있는 사내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당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가?”
미지의 사내는 마치 나를 꾸짖기라도 하는 어조로 물었다.
“내 생각에는 자네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지금 이 순간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왜 자네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너무나도 궁금해 하고 있으니까.”
“궁금하지만 상관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움직이지 않는 팔 탓에 억지로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당신이 나의 도플갱어건, 아니건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라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죠?”
“상관이 있지.”
미지의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도플갱어는 자신을 닮은 나머지를 보게 되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지. 그리고 자네는 모르겠지만 이미 나는 자네를 보았고 말이야.”
“그런 건 다 미신입니다. 말도 안 되는 그러한 미신으로 몇몇 사람들만 믿고 있단 말입니다!”
나는 항변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믿지도 않았고, 그런 것이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당신이 무슨 목적으로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그 목적이 나에게는 하나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래?”
미지의 사내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너는 지금 경제적으로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할머니라는 말이 듣고 싶은 노모에게 몇 달이나 생활비를 드리지 못했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나의 생활비를 꾸기 위해서 벌써 몇 번이나 전화를 해서 심지어 전화를 받지 않는 친구들까지 생기고 있었다.
“10억. 10억을 주지.”
숨이 턱 막히는 금액이었다. 10억이라니, 도대체 내가 얼마나 일을 해야지 벌 수 있는 돈인 것일까? 아니 내가 평생을 돈을 모아 저 돈을 만져볼 수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왜 내게 그렇게 큰돈을 준다는 거죠?”
“나를 찾게.”
미지의 사내는 어린 아이에게 가위바위보라도 제안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가벼운 목소리로 나에게 제안했다.
“그저 자네가 나를 찾는다면 자네가 지금 듣고 두 눈이 커다래진 그 금액을 자네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주지.”
“그럴 일 없습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나는 도플갱어라는 것을 믿지도 않고 당신을 찾고 싶은 생각도 하나 없으니 말입니다.”
“요즘 들어 당신의 어머니가 더욱 아프시지 않나?”
마음의 한 구석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묘하게 요즘 들어 어머니께서 식욕을 잃고 하루 온 종일 아무 것도 드시지 않는 날도 생기고 있었다. 어머니는 속앓이를 하실 때면 늘 그렇게 끼니를 거르셨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야.”
“요즘 더욱 심해지셨지.”
미지의 사내는 마치 조롱이라도 하는 목소리로 확정하듯 말했다.
“위암이야.”
“뭐라고요?”
오늘 이 사내와 통화를 하면서 가장 불쾌하고 가장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단어였다. 위암이라니, 나의 모친이 위암이라니.
“그 딴 식으로 사람에게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난이라고?”
미지의 사내는 말끝을 올리며 나의 신경을 자극했다.
“지금 내가 너에게 전화를 하면서 단 한 가지도 거짓말을 한 적 없어. 나는 지금 너에게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진실이라고요?”
도대체 이 터무니없는 사내는 자신의 말 중 그 어느 부분이 말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기에 모두 진실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도플갱어부터 우리 어머니의 위암까지 그 어느 부분도 신빙성이 가지 않는 거짓말이고 공갈이며 협박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 식으로 장난을 친다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미 너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너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나쁜 일이야.”
미지의 사내의 목소리를 듣던 나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미지의 사내의 목소리의 변화와 함께 나의 기분 한 구석도 묘하게 나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너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서 정말 오랜 시간 망설였어. 그리고 너에게 전화를 하고 나서는 망설이지 않게 되었지.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 운명이니까.”
“아무튼 당신을 찾지 않을 겁니다.”
나는 힘주어 말을 하고 겨우 움직이는 팔로 종료 버튼을 누른 후, 휴대전화를 벽에 던져버렸다.
“미친 놈.”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자려고 아직까지 이불에 누워 있어?”
“네.”
벌써 30년 째 나를 깨우는 모친의 목소리에 눈을 비비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전화와 함께 있었던 그 모든 대화의 내용이 정말일까 너무나도 궁금했다. 재빨리 베개 옆 휴대전화를 열어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불안함, 초조함 그러한 것들이 모두 한 데 어우러져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뭐야, 이거.”
정말이었던 것일까? 그 미지의 사내와 통화를 한 그 모든 상황이 다 사실이었던 것일까? 그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가 숨겨 있다는 문구를 보여주며.
멍하니 미스터도넛에 앉아있던 나는 그다지 좋지 않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분명히 어떤 사내가 전화를 걸어서 잠을 깨웠고 도플갱어니 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며 10억을 제시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을 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는 부분이 단 한 구석도 없었기에 일단 오늘도 속앓이를 하고 계신 어머니를 집 근처 성가병원으로 보냈다. 어머니의 진료 결과가 그를 믿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해줄 것이었다.
‘위잉.’
얼마나 지났을까? 멍하니 창밖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던 나에게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아이고, 이제 어떻게 하니?”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
“엄마 왜 그래요? 응? 왜 그래?”
“위에서 종양이 발견이 되었대. 아직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래.”
그 동안 오랜 시간을 마셔오면서 단 한 번도 쓰다는 생각을 한 적 없던 아메리카노가 입 안에서 쓰게 맴돌고 있었다.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는 시럽이 커피를 달콤하게 해주는 것과 다르게 커피의 씁쓸하고 시큼한 맛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엄마 지금 어디에요?”
“병원.”
“내가 갈게요.”
비틀비틀 가방을 겨우 주워들어 가게의 문을 나섰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어머니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엄마 내가 지금 바로 갈 테니까 병원 로비에 계세요.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시지 마시고요.”
“알았다.”
휴대전화를 끊고, 재빨리 택시를 잡았다. 부천역 근처다 보니 다행히 택시는 많이 지나갔고 곧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성가병원이요.”
“예.”
밖을 내다보며 왜 이렇게 택시기사가 천천히 달리는 것일까 고민을 하고 있던 순간. ‘위잉’ 소리와 함께 발신자 표시 제한이라는 문구가 휴대전화의 액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사내가 분명했다. 어머니에 대해서 악담을 퍼붓던 그 사내가 아니고서야 지금 이 상황에 나에게 발신자를 숨기고 전화를 걸 사람은 없었다.
“여보세요?”
“내 말이 맞지?”
사내는 너무나도 유쾌하다는 목소리로, 어쩌면 키들거리며 웃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목소리로 내게 동의를 구했다.
“내가 분명히 그러한 일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잖아.”
“당신 도대체 누구야?”
가까스로 화를 누르며 물었다.
“당신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일들을 다 알고 있는 거야?”
“말 했잖아.”
미지의 사내는 아주 어린 아이에게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사실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다정한 어조로 목소리를 바꾸어 내게 설명했다.
“나는 너의 도플갱어고 우리는 서로 닮은 사람이고 만일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보게 된다면 둘 중 한 사람은 죽게 된다고 말이야.”
둘 중 한 사람이 죽는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내의 말은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죽을 거라는 그러한 이야기였다.
“나는 당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니까 우리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죽을 일은 없어.”
“그렇다면 나를 찾아.”
사내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리더십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말을 들으니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너의 말대로 너는 도플갱어를 믿지 않는다면 너는 나를 봐도 죽지 않는다는 거잖아?”
“그래.”
“그러면 나를 찾아.”
미지의 사내는 이제 겨우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작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는 그냥 10억을 받아서 좋은 거고 나는 도플갱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서 좋고. 어때? 만족해?”
“나에게 그렇게 낭비할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어머니가 당신 말대로 위암일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믿으라는 거야.”
떨리는 나의 목소리와 상반되게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했고 안정적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거짓을 말한 것이 없어.”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것입니까?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요.”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기 위해서 애써 울음을 삭히며 낮게 외쳤다.
“나의 모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너의 모친은 분명히 수술만 하면 살 수 있어.”
미지의 사내는 간단한 이치를 이야기 하는 어조로 쉽게 말을 했다.
“아무리 위암이라고 하더라도 너의 모친이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단 수술은 해야 해.”
미지의 사내의 목소리는 묘하게 유쾌했다.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모든 것이 진행이 되자 기분이 굉장히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에게는 돈이 없잖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마지막 이성을 붙들며 대꾸했다.
“도대체 얼마의 돈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어머니를 위해서 그 정도 돈은 만들 수 있습니다.”
“꽤나 많이 들 거야.”
“상관없습니다.”
마치 나에게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강인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이 사내에게 모든 희망을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저의 삶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오케이.”
사내는 선선히 대답했다.
“하지만 곧 다시 나를 찾게 될 거야.”
“그럴 일 없습니다.”
으르렁거리며 대꾸했다. 이 사내는 전혀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분명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고 있었다.
“아무튼 나쁘지 않길 바라지.”
“감사하군요.”
그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를 하고는 전화를 거칠게 끊었다.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먹먹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나의 속을 이렇게 뒤집어 두는 거야?”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답답했다. 다행히 곧 병원이 보이기에 나는 택시에서 내려서 조금 걷기로 생각을 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 조금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것이 내가 이성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 엄마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셔?”
“며칠 걸린대.”
그 사이 모친의 얼굴은 많이 지쳐보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일단 선생님은 뭐라고 하셔?”
“아직 정확한 건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대.”
“하아.”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동안 왜 자신이 이렇게 모친에게 무심했는지 자신이 밉고 다시 또 미웠다.
“엄마 일단 그럼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거죠?”
“응.”
모친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이 병원 냄새를 맡으니까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했는데 네가 온다고 해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어서 나가자.”
“나 참.”
엄마의 말을 들으니까 내가 너무나도 못된 아들이라도 된 모양새였다. 병원 로비에 있으란다고 가지도 않는 이렇게 미련한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가?
“아니 내가 언제 엄마보고 나가지 말라고 했어?”
“어?”
“휴우, 아니야. 일단 우리 나가자. 엄마 여기 답답하다니까 일단 나가요.”
“그래.”
모친은 방금 전보다는 다소 혈색이 좋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친을 보니 마음이 더욱 단단히 굳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그래.”
평생 사드린 적 없는 컵 커피를 사드리며 어머니와 나는 미스터도넛에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엄마도 커피를 좋아했어?”
“잘 모르겠는데 나는 믹스밖에 안 먹어봐서.”
하지만 모친의 얼굴은 그 다디단 캬라멜마끼아또를 마시며 연신 빙긋 웃고 있었다.
“엄마 분명히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공연히 걱정해서 병만 키우지 말아요.”
“알았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그렇게 알아서 해서 그 모양이냐고 쏘아 부치고 싶었지만 지금 모친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검사 결과는 언제나 나온대?”
“오래 걸리지는 않고 한 일주일이면 될 것 같대.”
일주일, 길다면 긴 시간이었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아니기를 바라면서 지내겠다고 속으로 작게 다짐했다.
“엄마 집으로 가요. 오늘 저녁은 내가 만들어드릴게.”
“정말로?”
“그럼.”
그제야 겨우 오랜 기간 하지 않았던 듬직한 아들의 역할을 자청하며 유쾌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정말로 위암이라는 판정을 받으니 하늘이 노래지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정말입니까?”
“예.”
의사는 이러한 일은 별 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일은 그로써는 매일같이 겪는 일일 테니까.
“오진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의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음과 동시에 얼굴을 구겼다. 나처럼 하찮게 생긴 놈이 자신의 의견을 무시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행히 그리 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방사선 치료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한 줄기 기대를 잡고 간절한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봤다. 의사는 그런 나를 딱하다는 표정으로 살짝 바라본 후,
“수술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무거운 말이 마음을 쾅 하고 울렸다.
“저기 선생님 대략적인 치료비나 그러한 것까지 다 얼마나 들 것 같으십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의사의 움직이는 입을 본 내 얼굴은 천천히 굳어갔다.
“하아.”
깊은 한숨, 깊은 심연.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나이라는 것도 먹을 만큼 먹은 녀석에게 감당할 수 없는 액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사랑하는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망 없는 액수가 필요했다.
“지금 이 상황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그러한 함정과도 같잖아.”
문득 나에게 전화를 했던 그 사내가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위암일 거라고 지껄이던 그 미지의 사내. 그 사내의 말이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모두 정답이었다. 혹여 그가 다시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을까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다시 한 번 그가 자신을 찾으면 10억을 준다는 미션을 내리면 반드시 그를 찾을 것이었다. 아니 그를 찾아야만했다. 그를 찾아야, 모친이 살고 더 이상 그의 괴롭힘에 시달리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평소에 그의 행동이나 언행을 살펴보면 내가 어디로 가고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다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그 개자식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아무런 연락이 없어.”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를 무시해서 그가 더 이상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다시 그가 나에게 그 제안을 하지 않는다면?
모친은 평생 보험금을 타 먹을 일이 없다고 말씀을 하시며 보험 따위를 들어 놓지 않으셨다. 즉 모친의 몸 안에 있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롯이 나와 모친의 돈으로 충당해야만 했다.
그 순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심장 역시 묘하게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누구에게는 불쾌함을 낳는 단어겠지만 이제 내게는 하나의 희망과도 같은 신호였다.
“여보세요.”
“기다렸나 보군.”
그였다. 그의 목소리는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을 때보다 조금 더 유쾌하고 편안하게 바뀌어 있었다.
“전화를 바로 받는 것을 보니 내 전화를 혹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였던 것인가?”
“당신은 다 알고 있죠?”
지금은 이리저리 둘러서 말을 할 시간이 없었다. 의사 역시 한 시라도 빨리 모친의 수술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기 전에 10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우리 어머니가 암이라는 것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었죠?”
“말 했잖아.”
미지의 사내는 답답하다는 어조로 나를 낮게 꾸짖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어. 그저 당신이 나를 믿지 않았을 뿐이지.”
“이제 믿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겨우 대답을 했다. 이 일은 나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었지만 나의 자존심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당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
미지의 사내는 지금 이 상황이 다소 얼떨떨하다는 어조로 대꾸했다. 아마 내가 모친의 위암 소식을 듣고도 그를 부정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더욱 쉬워지겠군?”
“그래요.”
미지의 사내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였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릴 것이 분명했다. 분명, 첫 전화에서는 모두 거짓이라고 길길이 날뛰던 녀석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이익이나 필요에 의해서 모든 것을 수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억을 주는 건가요?”
“그 이상도 주지.”
미지의 사내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차피 도플갱어라는 것이 진짜로 있다면 둘 중 한 사람은 죽게 되어 있어. 만일 죽지 않는다면 다시 시작된 삶에 감사를 하며 너에게 그 돈을 주는 것이고 내가 죽는다면 네가 살아남았으니 당연히 나의 돈을 가지게 되는 거야.”
“좋아요.”
도플갱어 그런 것은 믿지 않았다. 그러니 무조건 그 돈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네가 죽는다면, 도플갱어의 법칙에 따라서 네가 죽게 된다면 나는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아.”
“그런 것을, 묻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좋아.”
미지의 사내는 꽤나 마음에 드는 상황인지 분명히 웃음소리로 들리는 것을 살짝 흘렸다.
“당신을 어떻게 찾으면 되죠? 당신을 찾을 단서라도 주는 것인가요?”
“오, 아니.”
미지의 사내는 지금 내 말에 일부러 과장되게 놀란 척을 하며 대꾸했다.
“나는 머리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무언가를 추리하고 그런 것은 내 체질이 아니야. 애초에 그런 문제도 낼 수 없는 머리고 말이야.”
“그러면 어떻게 할 거죠?”
“내가 어디에 있을지 말을 해주지.”
미지의 사내는 너무나도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치 그는 이러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본 사람처럼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럼 그냥 너는 나를 찾아와서 네 말이 맞는지, 내 말이 맞는지만 확인을 해주면 되는 거야.”
“정말 그 뿐인가요?”
“그래.”
그는 잠시의 고민도 하지 않고 질문에 바로 답을 했다. 분명히 이러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온 몸에 닿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미지의 사내는 어떠한 경로를 통하던 이러한 상황을 이미 만난 적이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 침착한 것이 분명했다.
“다른 도플갱어를 만났나요?”
“다른 도플갱어라.”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 정적이, 수화기 사이에 흐르고 있는 정적이 심장을 덜컥 붙잡고 있었다. 커다란 납처럼 심장을 덜컥 물고 있었다.
“네가 도플갱어를 믿지 않는다면 나는 도플갱어를 만난 적이 없지만, 이제 너도 그 존재에 대해서 어렴풋이 인정을 한다면 나는 이미 그들을 만난 적이 있어.”
“그들은 어떻게 되었죠?”
내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그 물음에,
“죽었지.”
그는 명쾌하게 답했다. 나의 생각과 딱 떨어지는 대답으로.
“그러니까 도플갱어라는 이유로 당신을 만나고 죽음에 닿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당신이 죽인 건가요?”
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만일 그가 죽인 것이라면 묘하게도 그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았다.
“혹시 당신이 당신을 닮은 사람이라 그것에 불쾌함을 느껴서 다른 도플갱어들을 죽인 건가요?”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미지의 사내의 목소리에는 엷게 분노가 깔렸다. 이러한 오해를 받는 것을 썩 유쾌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성격임에 분명했다.
“나는 애초에 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의 죽음이나 그러한 것을 시작하지는 않아.”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죽은 거죠?”
“말했잖아!”
미지의 사내의 목소리는 어느새 첫 통화 시작과 다르게 흔들리고 거칠어지고 있었다. 나의 말이 그의 심장에 요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바다는 미친 모양새로 풍랑을 일으키며 그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어. 그리고 그 누구도 죽일 생각도 없어. 그저 나는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을까, 아니면 죽지 않을까 그것이 궁금한 것 뿐이야.”
“당신의 말대로 도플갱어를 만나서 죽는 거라면 당신이 살인자군요.”
나의 물음에 그는 그제야 그렇게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미지의 사내의 숨소리만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이, 이봐요. 괜찮아요?”
“나를 당장 찾아와.”
미지의 사내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음침하고 추악하게 변하고 있었다.
“네가 과연 나를 보고도 지금 나를 능멸한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너무나도 기대가 되는 군.”
“나는 그럴 겁니다.”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하는 나에 반해 그는 점점 확신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로 당신을 찾아가면 되는 거죠?”
“학교.”
“학교요?”
도대체 대한민국에 학교가 몇 개나 있는지 알고 그는 이 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학교를 말을 하는 거죠?”
“네가 졸업한 학교.”
졸업한 학교. 나의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게 하였던 나의 학창시절의 기억인 학교.
“너의 모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유쾌한 기억은 아닌 모양이군.”
미지의 사내는 나의 떨림을 감지한 모양인지 다시 유쾌한 어조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교로 오면 내가 있지. 너를 얌전히 기다리면서 10억이 든 가방을 들고 말이야.”
“어, 어느 학교를 말을 하는 거죠? 학교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떨지 말라고.”
다시 상황은 역전되어 미지의 사내가 나를 달래주고 나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나는 내 힘으로 당신을 죽일 생각이 하등 없어. 나는 그저 나를 닮은 사람이 궁금한 것뿐이야.”
“저는 그저 돈 뿐이죠.”
마치 탁구를 치듯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이어서 받아치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그 누구도 상대방에게 점수를 내어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당신을 찾아가야 하죠?”
“그래야 네가 죽으니까.”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래야지 내가 죽다니.
“도플갱어는 다른 도플갱어를 보면 죽게 되어 있어. 그러나 그 상황에서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이 죽음을 맞게 되어 있어. 그것이 도플갱어의 규칙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는 이미 도플갱어 자체를 믿지 않고 있잖아.”
미지의 사내는 핀잔을 주었다.
“네가 도플갱어 자체를 믿지 않고 있으면서 이러한 이야기에 괜히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가 뭐야? 혹시 이제 그 존재를 믿는 것인가?”
“아니요.”
그의 물음에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러한 존재가 믿는 것을 믿으며 같이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당장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 이상스러울 만큼 크게 느껴지는 긴장감에 목 안이 바짝 말라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내가 당신을 찾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하죠? 혹시 내가 당신이 준 힌트 같은 것을 듣고 당신을 찾아 나서기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
미지의 사내는 유쾌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런 일을 하기에 내가 너에게 연락을 한 시점이 너무나도 과거가 되어버려서 말이야.”
“무슨 말이죠?”
미간을 가늘게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이 사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리 유쾌한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별 일은 아니야. 아무튼 그다지 큰 일은 아니야. 그냥 너의 흔적을 하나 둘 찾아서 오면 나를 발견하게 될 거야.”
“나의 흔적이라고요?”
“그래.”
도대체 나의 흔적이라는 것이 무슨 소리일까?
“나의 흔적을 어떻게 찾으라는 거죠?”
“네가 졸업한 학교, 직장 그러한 곳을 찾아다니다보면, 내가 어디에 있을지 바로 감이 올 거야.”
등 뒤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감, 아주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 내가 나의 흔적을 찾아 따라다니면 분명히 당신을 발견할 수 있게 디는 것인가요?”
“물론.”
미지의 사내는 정말 경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모든 일이 딱딱 맞춰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만일 내가 당신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럴 리는 없어.”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다소 집요하리만큼 그를 붙잡았다. 그 만약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나에게 유리하게 기울일 수 있다면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
만약이라는 것은 미지의 사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 부분을 내가 건드릴 수만 있다면 그가 제시하는 이 게임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만일 네가 나를 찾지 못한다면 네가 나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내가 직접 움직여주지.”
“후우.”
해볼 만한 게임인 걸까? 이러한 종류의 게임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돈은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내게 주는 거죠?”
“바로 준다.”
미지의 사내는 어느새 목소리에 감정을 지우고 있었다.
“5만 원짜리 지폐로,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바로 너에게 주겠다.”
“5만 원짜리 지폐로 10억을 만들어준다고요? 당신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인가요?”
“일단 그런 소리는 찾고나 지껄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군.”
그랬다. 조금이라도 더 이르게 돈을 마련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모친을 건강하게 만드는 곳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에게 무언가 속임수나 그러한 것을 쓸 생각은 아니죠?”
“물론.”
미지의 사내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속임수를 쓸 거였다면 이렇게 정직하게 나의 존재를 찾아보라고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 거야. 나랑 통화를 하면서 내가 그러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파악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너무나도 과대평가 한 것인가?”
그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자존심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그 어느 것도 가지지 못한 나였지만 자존심 하나만은 절대로 잃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단조로우면서도 나를 타박하는 목소리는 나의 자존심을 천천히 한 계단, 한 계단 여유롭게 망가뜨리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당신의 생각보다 빨리 찾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특별한 보상이라도 있는 것인가요?”
“오해를 하고 있나보군.”
“오해라고요?”
그의 새로운 목소리에 귀가 쫑긋하고 섰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무슨 오해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 나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야.”
감정이 사라졌던 미지의 사내의 목소리에서 다시 작게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지금 살아난 감정은 웃음이라는 감정이었다.
“지금 우리는 단순히 누가 누군가를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목숨을 걸고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지도 모를 상황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저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나는 도플갱어 따위를 믿지 않으니까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해요. 만일 내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당신을 찾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
미지의 사내는 다소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눈썹이 올라가 있었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을 지는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이 만나서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확인하면 알 수 있겠군.”
“그렇군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그와의 대화시간은 이미 꽤나 흘러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그를 잡고 싶은 나와 다르게 그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지금 초조한가 보군. 그렇겠지,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어머니를 살리고 싶을 테니까 말이야.”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리고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나를 알고 있었다.
“시간은 많아. 네가 나를 찾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 오늘 안에도 네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나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당신을 찾는 순간 당신은 어딘가를 향해서 움직이실 건가요?”
미지의 사내는 마치 그 점은 고려하지 못했다는 어조로 잠시 신음을 흘렸다. 움직인다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는 편이 더욱 당신이 나를 찾기 쉬운 것일까?”
“당연히 한 자리에 있는 것이 더욱 찾기 쉽지 않겠습니까?”
점점 더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나는 따지는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찾아서, 나에게 유리한 모든 것을 얻어내야 했다.
“당신이 한 자리에 있어야 내가 당신을 찾지 못한 자리는 다시 가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좋아.”
미지의 사내는 흔쾌히 대답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기를 바란다면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있어주지.”
“나의 흔적을 찾으라고 했죠?”
“그래.”
나의 흔적, 나의 흔적, 도대체 그 흔적이 무엇인 것일까?
“네가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나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지.”
“나 역시 바랍니다.”
“쿡.”
미지의 사내가 나에게 흘린 마지막 웃음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를 찾는 것이 임무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나의 흔적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어디서 찾아야 잘 찾은 것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나의 흔적을 하나하나 쫓았다.
‘부천 북 고등학교’
겨울 방학을 맞아 학생이 없는 오후의 교정은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게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후우.”
오랜만에 만나는 학교는 나에게 무언가 위협감과 같은 것도 주고 있었다. 압박감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마치 이 건물이 나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찾을 수 있는 곳이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교정으로 들어섰다.
학창시절에는 절대로 신발을 신고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바로 교내였다. 늘 청소를 해야 했고, 바닥에 흙이나 그러한 것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선생님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졸업생이 되고, 이렇게 딱히 의미를 가지지 않는 방문으로는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것을 제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높았나? 라고 생각을 하며 3학년, 가장 괴로우면서도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4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색과 하얀 벽, 그리고 때 묻은 차가운 콘크리트 벽이 마치 숨을 쉬며 나를 반갑다고 맞는 느낌이었다. 4층의 어두운 복도는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기에 더욱 스산한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1반부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꽤나 긴 복도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서로를 잡기 위해서 달리기도 하던 공간이었다. 문득 발걸음이 어느 한 가운데서 멈추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머물었던 교실이었다. 안을 보고 싶었지만 자물쇠로 단단히 걸어 잠겨 있었다.
그 때, 고등학교 시절 열쇠를 간직하던 방법이 떠올랐다. 소화기 밑을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더듬어보니 역시나 열쇠가 있었다. 가느다란 열쇠를 가지고 묵직한 자물쇠를 여니 무거운 공기가 훅 하고 나에게 끼쳐왔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공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의 흔적.”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책상이었던 곳은 내가 해 놓은 낙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괴로움의 시간을 넘어’
칼로 새겨 놓았긴 하지만, 이런 흔적이라면 누군가 책상을 바꾸어도 진작 바꿨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후배로 들어온 학생이 귀찮았던지, 이것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은 덕에 다행히 나는 이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언가 잔뜩 폼을 잰 글이었지만 오늘에 보기에 부끄러워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창가로 다가섰다. 한 쪽 깨진 유리창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히 고쳐져 있었다.
여름이면 책상을 내놓고 공부를 하던 난간은 쓰레기 몇 개만 나동그라져 있을 뿐 그 어떤 흔적도 남겨놓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이곳은 그 자가 숨겨져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 자가 숨어 있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도 아님이 분명했다.
나의 흔적을 찾아서 온 것이었지만 나의 흔적을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라 미리 예상을 하기는 했었다. 허나, 아무리 첫 발걸음을 옮긴 곳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위잉’
순간 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모친이었다.
“여보세요?”
“어디니?”
늙은 모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나를 걱정한다는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 몸 하나도 제대로 못 가누는 모친은 아직도 어린 자식을 걱정하고 있었다.
“할 일이 좀 남아서, 아직 밖에 있어요.”
“밖이 추운데.”
“괜찮아요. 옷 따뜻하게 입었어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으면 이 사소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 너무나도 미안하다는 것을 분명히 모친도 깨달을 일이었다.
“왜 전화한 거예요?”
“왜긴.”
모친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 묻어났다. 내가 전화로 짜증을 낼 때마다 모친은 목소리 가득 미안함을 묻어 사과를 건넸다.
“바쁜데 미안하다.”
“미안하긴!”
나도 모르게 욱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엄마는 늘 왜 그렇게 나에게 미안해하기만 하는 건데요? 엄마가 도대체 나에게 미안할 일을 뭐 그렇게 많이 했다고 늘 그렇게 나에게 미안해하기만 해. 도대체 왜 자꾸 그렇게 나에게 미안해하는 거야? 응, 왜 그러는 건데?”
“아, 아니 엄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휴, 됐어요.”
모친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모친에게 화를 내자, 마치 자신이 너무나도 추악한 인간으로 변해버린 기분이 드는 그였다.
“엄마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나 반드시 엄마 살리고, 엄마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할 거니까 절대로 걱정하지 말라고.”
“알았어.”
모친의 목소리에는 쓸쓸함도 묻어나고 있었다. 모친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큰돈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러나 모친은 반대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하나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엄마. 정말로 아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할 방법을 찾았어. 엄마는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이제 수술만 하면 되는 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절대로 다른 마음먹지 말고 괜히 포기 같은 것도 하지 말아요. 알았죠? 나 엄마 없으면 절대로 못 살아. 엄마 밖에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데 엄마가 그렇게 약한 마음 먹으면 안 된다는 거, 엄마가 더 잘 알고 있죠?”
“그래 잘 알고 있어.”
모친의 목소리는 확실히 힘이 없었다. 모친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자, 더욱 더 미지의 사내를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를 잡아야만 모친의 목소리에 다시 생기가 돌 것이었다.
그를 잡는 것은 단순히 그를 잡는 일이 아니었다. 그를 잡는 것은 다른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가장 소중한 모친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미지의 사내를 잡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려는 것은 아니지?”
“아니야.”
모친의 염려가 무엇인지 알기에, 겨우 씁쓸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답했다. 괜한 이야기를 하여 모친의 걱정을 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마음이 약한 모친이었다. 사소한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작은 일에도 크게 걱정을 하는 성격을 지닌 모친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야기로 공연히 모친의 마음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본인의 병이나, 여타의 것들로 인하여 충분히 마음이 아프고 무거울 모친이었다. 자신까지 괜히 무언가를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할 일은 절대로 안 해. 엄마 아들인데, 내가 감히 그런 일을 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만일 엄마가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많이 서운해.”
“그래 알았다.”
모친은 그제야 다소 미소가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
“아무튼 엄마 지금 혼자 있으니까, 무슨 일이던지 빨리 끝내고 집으로 와. 엄마 수술하기 전에 너 따뜻한 밥이라도 해주려고, 네가 좋아하는 육개장 끓여 놓았어.”
“힘든데, 왜 그래.”
유난히 마음이 무거웠다. 모친은 정말 자신이 아프던 말든 그러한 것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친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건강이 아니라, 마치 나인 모양이었다.
“금방 들어갈게요.”
“그래.”
모친은 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듯, 쉽사리 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먼저 전화를 내려놓아야 했다.
“엄마, 내가 여기저기 물어본 것이 많아서 전화가 올 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먼저 전화 끊을게.”
“그래, 알았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기계의 조작처럼 사람의 삶 역시 그리 쉽게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에 마음은 무거웠다.
“엄마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반드시 돈 가지고 갈게요.”
마치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모친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엄마 미안해요.”
변변한 직업이라도 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돈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모친이 그 동안 직업을 가지라고 읍소를 할 때, 그렇게 해주지 못하던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나의 흔적을 찾는 일이라고 했는데, 내가 나온 중학교와 초등학교 모두 미지의 사내를 볼 수 없었다. 그는 분명히 학교에 있다고 말을 했었다. 그러나 내가 나온 모든 학교를 뒤져도 그의 흔적을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장난이라도 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재빨리 고개를 저어 그 흔적을 지워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 정말로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길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를 찾는 것이, 내게 전화를 건 미지의 사내를 찾는 것이 지금 그가 신경을 써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공연히 다른 생각을 해서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 피었다가, 오래 전 끊었던 담배의 생각이 간절했다. 모친의 오랜 소망이었던 금연을 결심한지 10개월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작은 하얀 막대기에 의지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상황은 나에게 담배를 피라고 강요라도 하는 것처럼, 눈앞에 편의점을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쭈뼛거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디스플러스 하나랑, 라이터 하나 주세요.”
“2800원입니다.”
앳된 얼굴의 직원은 기계처럼 담배와 라이터의 바코드를 찍고는 금액을 말했다. 품 안에서 구겨져 있는 5000원 지폐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5000원 받았습니다.”
모든 말이 순서라도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직원은 너무나도 익숙한 표정을 지으며 익숙하게 행동을 했다. 그 모든 것은 마치 하나의 이어짐으로 보였다.
“현금영수증 필요하세요?”
“아니요.”
탁한 목소리에 직원은 살짝 그를 바라보았다가,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잔돈을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수고하세요.”
천천히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하늘이 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모양새였다. 도대체 자신의 흔적을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의 흔적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미지의 사내가 말을 하는 나의 흔적은 정말로 있기는 한 것일까?
답답하고, 다시 또 답답한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흔적을 도대체 어찌 찾으라는 말인가.
“진짜 뭐 같네.”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마른 입술이 담배에 바로 달라붙었다. 그 담배를 때면 피가 날 것처럼, 담배와 입술은 딱 붙어 있었다.
미리 침을 바르고 담배를 물었어야 하는 건데, 하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왕 문 담배였다.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후우.”
그리고 내뱉는 숨 속에 섞여 있는, 아니 숨이 섞여 있는 뿌연 연기를 보면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삶 역시 저렇게 뿌연 연기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저렇게 뿌연 연기를 닮아 있는 삶이었다.
‘위잉’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인 것 같았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아. 하는 작은 신음을 흘리며 휴대전화의 액정을 확인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
그가 분명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기다린 모양이군?”
미지의 사내는 더욱 흥미가 생겼다는 말투로 물었다. 담배 필터를 내려다보니 입술 모양으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피를 보자 입술이 살짝 쓰라렸지만 크게 생각할 부분은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솔직해졌군.”
미지의 사내는 굉장히 흡족한 어조로 대꾸했다.
“도대체 이 날씨에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거야? 왜 이렇게 나를 찾지 못하는 것이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화가 솟구치려고 했지만 겨우 진정하고 대답했다. 도대체 이 사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말도 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을 찾으라고 하는 것일까?
“당신의 흔적, 그러니까 나의 흔적을 찾는 일이 당신의 생각처럼 그렇게 쉽기만 한 일은 아닙니다.”
“당연하지.”
미지의 사내는 한심하다는 목소리를 섞어서 대꾸했다.
“도대체 너라는 녀석은 돈이라는 것을 버는 것이 그렇게 쉬울 것이라 생각을 하는 거야? 돈을 버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아. 너는 지금 돈을 벌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당신은 조금이라도 빨리 나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야지 당신의 생각이 맞는지, 아니면 당신의 생각이 틀린 것인지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미 꽤나 오래 기다렸어.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서 그 기다림이 짧아지는 것은 아니니, 오히려 즐기는 편이 나에게 더욱 기쁜 일이지. 네가 그렇게 나를 찾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유난히 즐겁고, 재미있게 느껴져서 말이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사내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히 자신을 어딘가에서 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재빨리 주위를 둘어보았지만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고 있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비꼬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을 하는 것일까?
“네가 지금 이 순간 급박하게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야. 그렇게 쉽게 나를 찾게되면 너에게도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는 것이 불가능해지잖아. 나는 이 일에 정말로 나의 목숨을 걸었어. 그러니 너도 이 일을 조금은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해주었으면 좋겠어.”
“나도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친의 일이 달려 있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었다. 미지의 사내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자신이 이 일을 쉽게 생각을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이 일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말을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그는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마치 내가 너를 찾는 일이 되기 때문에, 내가 죽게 될 거야. 그런 일은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거든. 나는 네가 죽기를 바라고 있어. 나는 살고 말이야.”
“나는 죽지 않을 겁니다.”
이를 악물고 답했다. 모친을 두고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러한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알았어.”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어조로 대꾸했다. 역시나 그는 이 일을 그저 재미로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소한 힌트라도 주십시오. 그래야지 내가 그대를 조금이라도 빨리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힌트?”
“예.”
잠시 그는 침묵을 지켰다. 내가 힌트를 요구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큰 힌트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당신을 조금이라도 빨리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커피라도 마시지.”
“네?”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이야기인가? 커피를 마시라니,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너를 되돌려보지. 그렇게 되면 나를 찾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쿡.”
미지의 사내는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은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이보세요.”
“네가 나를 정말로 간절히 찾기를 원한다면, 정말로 간절히 너를 찾기를 원해. 그렇게 너를 찾기를 원하다보면 너는 정말로 나를 찾을 수 있게 될 거야. 네가 정말로 너를 찾는 그 순간에야, 너는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답답한 사람이었다. 그로써는 모든 해답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것이 하나도 답답하지 않겠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한 힌트를 주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겁니까? 그냥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면 되는 거잖아요!”
“그럼 끊지.”
“이봐요!”
그렇게 전화가 끊겨 버렸다. 대단한 사내였다.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었다. 무서운 사내였다.
“나에 대해서 천천히 찾다보면 그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러한 말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와 내가 닮아 있다고 하지만 내가 그를 찾는 것이, 내가 나를 찾는 것과 정말로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가 어설픈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를 찾아서 그를 족치기 전에는 그 어떤 해답도 들을 수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답답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나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그림자처럼 나는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찾기만 해보라고, 그렇게 속으로 윽박지를 수 밖에 없었다. 고생시킨 것을 꼭 복수하고 말 것이었다. 그를 찾아서 그렇게 복수를 하는 것이 지금 나의 유일한 마음이었다.
“젠장.”
순간 손이 뜨거워서 보니, 긴 담배는 짧은 꽁초가 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멍하니 들고 있었다가는 엄지와 검지의 끝에 화상이라도 입을 기세였다. 손을 흔들어서 그것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이후, 뜨거운 손가락을 입 안으로 가져갔다가 재빨리 그것을 도로 꺼냈다.
손가락 끝에서 쓴 맛이 묻어났다. 담배의 맛이었다. 도대체 전에는 이것을 무슨 맛으로 피었던 것일까? 오랜만에 느끼는 담배 필터는 역겹고 구역질이 나는 맛이었다.
순간 나는 미지의 사내가 나에게 담배꽁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에게 하나의 자극이었다. 무료하고 평범한 삶을 살던 내게 던지는 하나의 돌팔매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긴장을 풀고, 다시 나를 붙잡을 수 있는 고삐 같았다. 그 동안 방만하게 살았던 나에게 주는 경종이었다.
“찾을 거야. 반드시.”
그리고 목을 비틀 거였다.
멍하니 커피를 바라봤다.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은 무엇이며, 내 나이는 몇 살이고, 내 존재는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짧게 다듬은 손톱은 그 아래 살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의 이는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나를 먹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먹는 것이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그렇게 한참 스스로를 물어뜯고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자, 직원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먹던 커피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린 후 밖으로 비틀비틀 걸어서 나왔다.
햇살이 이렇게 눈부시고 불편한 것을 그 전에는 왜 몰랐던 것일까? 손으로 해를 가리며 힘없이 걸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야속하고 얄밉게 느껴졌다.이 햇살이 너무나도 싫었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마치 지금 닥친 상황과도 닮아 있었다.
내가 아무리 도망을 가려고 해도 도망을 갈 수 없는 상황, 내가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과 맞닿아 있었다.
“아닐 거야. 정말로 그건 아닐 거야.”
머릿속을 헝클어뜨리고 있는 그 생각을 부정하고 싶었다. 만일 정말로 나를 찾는 곳이라면, 정말 그 곳에 그 자가 숨겨져 있다면 그 곳은 오직 하나였다.
“후우.”
그가 그곳에 없기를 바라야 했다. 그 곳에 그 어떤 불쾌한 기억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집을 바라보고 감히 그 곳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일 정말로 미지의 사내가 내 방에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괴로울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제발, 제발 이 곳에 그가 있지 않게 해주세요.”
나름 간절한 기도를 한 후,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집 안은 냉랭한 것이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묘한 위화감과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히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묘하게 그 안은 이상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 있어요?”
부질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물음을 던지고 말았다.
만약 미지의 사내가 있다면 분명히 대답을 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답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끼익’
의자가 바닥과 마찰을 내서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묘하게 등에 소름이 돋게 만들고 있었다. 이 집안에, 분명히 그 누구도 있어서는 안 될 공간에 분명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을 하는 소리였다.
“누, 누굽니까? 거기 지금 누구 있는 겁니까?”
‘끼익’
내가 지난 세월 함께 지냈던 나의 방문이 열렸다. 그러나 다행히 거기서 아무도 나오지는 않았다. 마치 그 공간으로 나보고 들어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묘한 긴장감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러한 기분은 느낀 적이 없었다.
두려운 일, 무서운 일, 피하고 싶은 일, 도망치고 싶은 일, 그 일에 드디어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일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모친은 지금 이 순간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모친의 기대를 저버리는 짓 따위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친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앞으로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훨씬 위에 있는 존재가 나에게 던지는 퀴즈나 시험인 것이 분명했다. 열린 문 안에서 더 이상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 미지의 사내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불쾌한 숨결이 그 방안에서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숨은 분명 이 집에 사는 그 누구도 내뿜을 수 없는 종류의 숨이었다. 지금 이 숨은 정말로 불쾌하고 역겨운 종류의 숨이었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일이었다. 여기서 돌아선다면 그 동안 마음을 졸인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조심스럽게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어릴 적 내가 나의 거북이를 죽였던 일이 생각이 났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붉은 귀 거북을 키웠었다. 겨울, 물속에 있는 그 생명체가 어쩌면 그렇게도 안쓰럽게 느껴졌는지 나도 모르게 그 가녀린 손으로 그것을 물에서 건져냈다. 버둥거리는 그것을 안고, 내 방 가장 따뜻한 곳에 내려놓은 뒤, 두꺼운 코트로 그를 덮어주었다. 이내 나는 그 사실을 잊고 혼자서 잘 놀았다. 그리고 저녁에 다 되어서야 그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했고, 그는 뜨거운 시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북이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거북이는 분명 죽지 않을 것이었다. 그 거북이에게 마음속으로 명복을 빌며 애써 숨을 가라앉혔다. 지금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무너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가라앉고 나자, 다시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었다. 이번에는 집게를 죽였던 일이 생각이 났다. 어린 날의 나는 집게의 그 집이 너무나도 무겁고, 너무나도 버겁게 보였다. 늘 그 가녀린 몸으로 그 커다란 집을 끌고 다녀야만 하는 집게의 숙명이라는 것이 안타깝고, 나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린 날의 나는 조심스럽게 그 집게를 들어 올렸다. 왜 그 순간 몰랐을까? 그 집게의 버둥거림이 살려달라는 버둥거림이었다는 것을. 도대체 왜 나는 그 버둥거림이 나에게 반갑다고, 나에게 고맙다고 하는 몸짓이라고 생각을 한 것일까? 그것의 버거운 인생을 덜어주기 위해서 나는 몸통과 집을 양 손에 나누어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버거운 삶 속에서 벗겨주기 위해서 손에 힘을 주고 곧 바스락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끝이 나버렸다.
나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다시 한 걸음 더 내딛었다. 눈이 하얗게 변했던 외가의 토끼가 생각났다.
아마도 무언가에 감염이라도 된 모양이었던지, 외가의 하얀 토끼는 눈동자 역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과연 그 눈으로 무언가를 볼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그 토끼는 나의 흔적을 느낀 것인지, 나의 모습을 본 것인지 제 새끼들을 더욱 더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물론 그날 저녁 반찬은 그 토끼의 새끼로 만든 토끼탕이었다. 미안했다.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제 새끼를 지키려뎐 그녀의 모성애에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어린 나는 어른들이 그 토끼를 먹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위해서 국물조차 입에 대지 않았다.
“하아.”
이제 고개만 돌려 방 안을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다. 두려웠다. 그가 있을까 두려웠고, 그가 없을까봐 다시 두려웠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나는 나를 향해서 미소를 짓는 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나를 찾았군.”
그의 목소리에서 매끄럽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나와 그의 행동이 다르다는 것에서 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찾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말이야. 내가 생각을 했던 것보다 머리가 다소 나쁜 모양이군. 이리도 오래 걸렸으니 말이야.”
“다, 당신이 거짓말을 했으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타박했다. 그가 정말 그의 말처럼 모교에 있었다면 진작 그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나의 모교에 있다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모교?”
사내는 비뚤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모교라는 말은 한 적 없어. 너의 학교에 있을 거라는 말을 했을 뿐이야.”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아니.”
사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학교와 모교는 다른 의미지. 네가 가장 먼저 무언가를 배우는 곳은 초등학교가 아니야. 바로 너의 집. 이곳이 너에게 가장 먼저 무언가를 가르치는 하나의 학교야. 그렇기에 너를 찾아서 오는 곳은 당연히 네가 태어나서 여태까지 자란 너의 집이 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지.”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려는 것이면 당장 때려치워요. 별로 듣고 싶지 않으니까.”
“거칠군.”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를 꼭 닮은 그의 그 행동에 묘한 불쾌감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내는 왜 나를 보려고 한 것일까? 차라리 자신을 닮은 사람을 보고 싶은 것이었으면 거울을 보는 것이 더욱 빠르지 않았을까? 굳이 나를 찾아야 했던 것일까?
“그런데 돈은 어디 있죠?”
“아.”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직 누구의 말이 맞는지 그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성급하게 행동을 하면 여태까지 기다리고 행동한 보람이 없잖아.”
“뭐라고요?”
나는 재빨리 그의 등 뒤와 옆을 훑었다. 그 어디에도 돈이 들어있을 만한 가방이나 여타의 물건이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가 나를 속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지금 내게 거짓말을 한 겁니까? 당신 혹시 나를 가지고 놀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
사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 불쾌함이 가득한 표정이 떠오르며, 그는 천천히 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돈이라는 것은 꼭 네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야. 네가 지금 나를 보면서도 내가 아니라 너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네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마치 내가 아니라 너일 수도 있는 것이고, 지금 네가 볼 수 없다고 믿는 돈이 바로 너의 발 옆에 놓여 있는 것일 수도 있어.”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날카롭게 묻는 나의 말에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턱으로 나의 발을 가리켰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리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가방이 나의 발 옆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돈이야.”
사내는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대꾸했다.
“내가 분명히 말을 했잖아. 네가 나를 찾으면 내가 너에게 10억이라는 돈을 준다고 말이야.”
“하.”
정말이었다. 그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돈이 생긴 것일까? 아니 그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이 돈을 병원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이 돈을 가지고 가는 시간이 빠르면 빠를수록, 모친이 회생할 가능성 역시 높아질 것이었다.
“당신의 말대로 내가 죽거나, 당신이 죽지 않았으니까 지금 이 게임은 내가 이긴 것이 분명하죠?”
“그런가?”
사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에게 불안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의 미소는 유쾌하거나 기분이 좋아서 흘리는 미소와 달랐다. 무언가 어두운 기색이 담겨 있었고 상대방에게 위협을 주는 미소였다.
“왜 그렇게 웃는 겁니까?”
“여기를 봐.”
그의 손에 검은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곧 나는 그것이 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총이야?”
“그걸로 무엇을 어쩌려는 거죠?”
“도플갱어는 둘 중 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어. 하지만 나는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기를 바라지 않고 있어.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야. 바로 너를 죽이는 일이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나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사내의 얼굴을 보아하니,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그 언제보다 진지했고, 내가 가장 진지했던 얼굴보다도 더 진지했다. 지금 그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를 죽이겠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당신은 나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저절로 죽는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저 당신은 내게 돈을 주고 나를 놓아주어야 한다고요.”
“마음이 바뀌었어.”
그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겨우 지금 그의 목소리가 뱀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목소리도 저렇게 차갑고 축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목소리는 정말 차갑고 축축했다. 뱀이 나의 온 몸을 휘감고 달아나는 느낌이 오직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느껴졌다.
“당신이 나를 죽인다면 분명히 당신 역시 죗값을 치루게 될 겁니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데 그렇게 될까?”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나의 시체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다시 있다면 나의 시체는 다시 잊혀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는 분명히 다른 도플갱어들을 죽이며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자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하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리는 없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이 돈을 가지고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가 나를 노리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그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다. 충분히 내가 그보다 약한 상황이었다. 그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최대한 즐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의 그러한 행동에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러한 행동은 공연히 그를 도발하는 일이었다. 그를 지금 이 순간 도발하는 것은 단 하나도 나에게 득이 되지 않을 일이었다.
최대한 그가 흥분하지 않게 만들면서 그의 시야에서 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가만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지금 나에게서 도망이라도 가려는 것인가?”
그는 나였고, 나는 그였다. 그는 내가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저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미 우리 두 사람은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고, 그것을 피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게 느껴졌다.
“일단 내 어머니를 살려야 합니다. 당신은 별로 그것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너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 나 역시도 잘 알고 있어.”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것이 너에게 중요한 일이지 나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야. 나야 오히려 너의 모친이 죽는 것이 더욱 편한 일이지. 그렇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 말이야.”
“뭐라고 했습니까?”
나도 모르게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 사내는 나의 모친의 목숨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기에 다른 사람의 목숨을 어쩜 이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반드시 나의 모친의 삶을 연장시켜야 합니다. 그것의 나의 의무고 나의 소망입니다.”
“그래?”
사내는 목소리를 비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다소나마 나보다 창백했다.
내가 그와 아주 조금이라도 다르게 생각이 되자 마음이 반대로 여유로워지고 있었다.
“당신은 절대로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뭐라고?”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그는 얼굴 한 가득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죽일 수 없다는 말이 그를 묘하게 자극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너를 죽일 수 없다는 거지? 너를 죽이는 일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닌데 말이야.”
“그거야 간단한 것 아닙니까?”
아무 것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나는 나오는 대로 모두 지껄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시간을 끌면서 그의 시선을 돌릴 방법을 떠올려서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네 말대로 내가 너이고, 네가 나라면 네가 나를 죽이는 순간, 너 역시 죽게 될 거야.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이 닮아있으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
사내의 목소리가 묘하게 흔들렸다.
“우리 두 사람은 도플갱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런데 내가 너를 죽인다고 해서 나까지 죽을 리는 없다고.”
“그래?”
이제 상황은 바뀌어있었다. 그는 묘하게 나에게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여태까지 죽인 것이 어쩌면 도플갱어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가 죽인 것이 도플갱어라고 할 지라도 나는 죽지 않을 지도 몰랐다. 그 이유는 몰랐지만 몸 구석구석에서 그런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피어올랐다.
“쏴!”
나는 당당히 외쳤다. 그의 총을 몸으로 받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온 몸에 가득 피어올랐다.
“네가 정말로 자신이 있다면 나를 쏴라. 네가 나를 쏜다면, 그렇게 된다면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을 할 수 있겠지.”
“하.”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의 일방적인 우위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상황이 지금 깨져있었다.
“도플갱어이건 아니건 그런 건 하나도 상관없어. 지금 이 순간 내가 너보다 간절해. 그렇다는 것은 내가 너를 이길 수 있다는 거야. 네가 정말로 나를 이길 수 있다면 그 총을 쏴. 그 총을 맞고 나는 당당히 버티어 낼 테니까.”
“단단히 미쳤군.”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떨까?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과 닮아있을까?
“그 동안 내가 너처럼 객기를 부리는 존재를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인가?”
설마? 다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가 정말로 다른 사람들을 죽인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일까?
“너는 지금 내가 너를 쏠 수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모양인데 말이야. 정말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너를 죽이는 것 따위 하나도 두렵지 않거든. 왜냐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야!”
‘탕’
총소리가 들렸다. 권총은 작은 덩치에 비해서 그 소리가 꽤나 큰 편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사내의 손에 들려있던 권총에서 나온 총알이 빙글빙글 도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게 보였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던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것을 볼 수 있는 것과, 내가 그것을 피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상황이었다. 분명히 나는 그 총알이 어디로 어떻게 언제 날아올 지를 분명히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몸은 그런 나의 생각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는 몸이었다. 총알은 천천히 날아왔지만, 나의 몸은 그것보다도 더욱 천천히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사내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자신이 승리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역시나 이런 싸움은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던 것일까?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왔다.
모친은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동안 변변한 것 하나 제대로 한 적 없는 아들이었지만 이번만은 기대를 하고 계실 지도 몰랐다. 자신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제 아들일 것이라고, 제 아들이 분명히 자신을 살릴 것이라고, 만일 나의 시체를 발견한다면, 물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내가 내 시늉을 한다면 모친은 내가 죽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모친이 사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쯤, 이미 모친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렇게 일이 흘러가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목숨이 다하는 것은 아깝지 않았다.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나의 목숨이 다하는 것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다만, 그 동안 단 하나도 내가 해주지 못했던 나의 모친이 모자란 내 탓에 돌아가신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나의 무력함이 이토록 처절하게 가슴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야 했다. 이 무력함으로 나의 모친의 마지막을 만날 것이 아니라면 지금 나는 살아야만 했다.
총알은 어느새 나의 가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순간 나는 이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피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슨 말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총알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살 수도 있다.
그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내가 그 총알을 피해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총알을 피할 수가 있었던 거지? 총알이었다고! 네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죽어! 네가 죽어야지 내가 살 수 있어. 그러니까 당장 죽으라고!”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내게 총을 겨누었다. 다시 한 번 날아온다면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를 덮쳤다. 나와 똑같은 덩치를 가진 사내. 똑같은 힘을 가진 사내, 내가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이, 이거 놔!”
내가 그의 손을 잡자 그의 얼굴에 불안함이 떠올랐다. 자신이 바라는 것과 이야기가 다르게 전개되자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거 놓으라고!”
“못 놔!”
내 목소리도 그의 목소리를 닮아서 비열하고 축축했다.
“지금 내가 너를 놓는다면 너는 나를 죽이겠지. 하지만 나는 죽을 수 없어.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한다고!”
“돈을 줄게!”
그제야 사내는 긴장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돈을 줄 테니까 당장 이 손을 놔. 너랑 나 두 사람 모두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놓으라고!”
“두 사람 모두 죽지 않아.”
그의 기분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기분이었기에 그가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던 것이었다.
“너는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어. 너는 나처럼 간절하지 않으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어.”
“하.”
그의 얼굴에 답답함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여태까지 그가 대한 그들은 모두 그의 마음처럼 행동을 하고, 그렇게 움직였던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렇기에 지금 이리도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절대로 죽지 않아. 네가 나를 닮아서, 혹은 닮지 않아서, 내가 너를 닮아서, 혹은 닮지 않아서, 그러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나는 죽을 수 없기에 죽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는 죽을 수 있기에 죽게 될 거야.”
“나도 죽을 수 없어.”
사내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애처로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 역시 중요해. 지금 이 상황에 내가 죽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단 말이야. 절대로 죽을 수 없어! 여기서 죽을 수 없단 말이야!”
“죽어!”
나의 목소리가 이리도 차갑고 이리도 공격적일 줄이야. 그녀가 왜 그리 나의 목소리를 싫어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수 있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살아!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겠군.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 분명해. 분명히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죽어야 하지.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야.”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자 그는 물끄러미 그 시선을 피했다. 점점 내가 그처럼 변해가고 있었고, 그가 나처럼 변해오고 있었다.
“나는 죽을 수 없어! 나의 어머니는 지금 이 순간도 내가 돈을 가지고 오기를 바라고 있어. 내가 돈을 가지고 가지 못한다면 나의 모친이 죽을 것이 분명해. 너는 나의 모친이 죽던말던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그 사실이 중요해. 네가 만일 나의 모친을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면 내가 너에게 죽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을 거야. 하지만 너는 나의 모친을 죽인다고 했으니까, 나의 모친을 살릴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나 역시 너를 죽일 거야. 네가 그러한 마음을 먹은 것처럼, 나 역시 너처럼 행동을 할 거야.”
“아, 아니야. 그런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야.”
사내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갈라지고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너의 모친을 살려줄게. 너의 모친이 죽는 것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줄게. 그러니까 제발 나를 죽이지 마. 나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어. 나는 아직 죽고 싶은 마음이 없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 네가 여태까지 죽였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단 말이야. 하지만 너는 아무런 준비도 없던 그 사람들을 죄책감 없이 죽였잖아. 나 역시 죄책감 없이 너를 죽일 거야. 너를 죽이는 것이 최소한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속죄를 할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있던 권총이 나의 손에 들려있었다. 잠금장치 따위는 이미 풀려있었다. 사내는 나를 진심으로 죽이려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나 역시 진심으로 사내를 죽여야했다. 진심으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다시 상황이 바뀌고 다시 나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었다.
“여태까지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또 다른 우리를 죽이지 않았다면 나 역시 당신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거야. 하지만 이미 당신은 당신을 죽였어. 당신이라는 남자는 이미 나를 죽이면서 살았단 말이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나 역시 너를 죽이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긴장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내 앞에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마치 개미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고 그 어떤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내를 죽이는 것은 그 어떤 마음에 부담도 가지 않을 일이었다. 이 사내는 나를 죽이는 일이었고, 다시 또 그는 나였기에 내가 나를 죽이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지우는 일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를 지우는 것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데 부담을 줄여줄 것 역시 분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다른 무언가를 죽여봤다는 사실이다. 만일 내가 거북이나 집게를 죽이지 않았다면 내 앞에 있는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무언가를 죽인 경험이 있었고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이 그리 버겁지 않은 일이라는 것 역시도 알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앞에 있는 것이 나라는 사실이었다.
“당신 지금 내가 당신을 못 죽일 거라고 생각을 하고 여태까지 미소를 지으면서 살았던 것 같아. 하지만 나 말이야. 당신이 생각을 하고 있던 것처럼 그렇게 가볍고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거든. 당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 행동하고, 또 그렇게 하고 말 거야.”
“나를 죽이면 후회할 거야.”
사내는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그 가녀린 외침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점점 마음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그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분명 이것이었을 것이다. 닮았기에, 너무나도 닮았기에 힘이 들고 목을 조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를 죽여야만 했다. 나를 닮은 그래서 후회를 할 지도 모르는 살인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만일 그러하지 못했다면 나는 그를 죽일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 손에는 총이 있었고,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었다. 내 앞에 있는 나를 죽이는 것 정도는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발로 밟아 죽이는 것 이상으로 쉬운 일이 될 것이었다.
“당신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살고, 나의 모친도 살고, 당신이 죽이려고 했던 또 다른 존재들도 살 것이 분명합니다.”
“하.”
그의 얼굴에 묘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깨진 파편. 깨진 조각. 모든 것은 즐거움을 위한 바탕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를 죽인다는 것은 너무나도 신나고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권총을 그에게 겨누었다.
가벼운 무게, 그러나 가볍지 않은 무게. 마치 그 동안 내가 지내왔던 나의 삶의 무게와 닮은 그 무게에 나는 마음은 무겁지만,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나를 찾아서 내게 속죄할 기회를 주었군요. 당신이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나를 찾은 건 너야!”
그가 거친 목소리로 다급히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서 한 때 골초였던 나의 목소리가 상기되었다. 진실로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움직였다.
‘탕’
그는 나처럼 그 총알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처음 쏘아 본 것이었지만 그의 가슴을 정확히 명중한 총알은 그가 피할 틈도 주지 않고 피를 분수처럼 쏟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피를 보는데 역겹다거나 두렵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아름답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의 가슴이 피로 물들기 시작해서야 그가 하얀색 드레스셔츠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보였다. 가슴부터 마치 꽃이 피어나듯 피로 물들고 있었다. 새빨간 그 꽃은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본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이 보였다. 그 아름다움은 마치 이 세상의 끝에서야 보일 그러한 아름다움이었다. 왜 여태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위잉’
오른쪽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 덕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액정을 확인하니 모친의 전화였다.
부들부들 떨면서 흰자위로 나를 노려보는 그를 향해 한 번 미소를 지어준 후, 나는 조심스럽게 목을 가다듬어 모친의 전화를 받았다.
“내 엄마.”
“왜 안 오니?”
모친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금방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아직까지 들어가지 않아서 걱정이 되신 모양이었다.
“지금 들어가요. 엄마, 의사 선생님한테 가능하면 빨리 수술 잡아달라고 해요. 나 지금 돈 구해서 들어가니까 말이에요.”
“그래?”
모친의 목소리는 묘하게 밝아졌다. 담담한 척, 무던한 척 그렇게 구셨지만 모친 역시 죽음이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계셨던 것이 분명했다. 그 늙은 모친에게 이제 더 이상 두려움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위안을 주면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번졌다.
내 앞의 사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피의 꽃 역시 아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그 꽃잎을 펼치고 있었다. 아마 곧 그 꽃의 만개도 멈출 기세였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권총을 그의 옆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물건이니 죽어가는 그에게 주는 것 역시 당연했다.
“엄마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정말 준비해두세요.”
“그래.”
모친의 묘하게 밝은 목소리가 묘하게 밝았던 나의 마음을 살짝 내려놓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지금 일이 너무나도 잘 풀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밖에 해가 쨍한 것을 보니 오늘 나쁜 일이 다 생기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 나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지금 당장 모친에게로 가서 모친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일이었다.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건, 그렇지 않건 그러한 것은 이미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설사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나의 모친을 살리지 못하는 것만큼 나쁜 일이 이 세상에 있을 리는 없었다.
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모친을 살리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를 죽인 것이고, 그렇기에 지금 미소를 짓고 서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피를 밟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며 방 밖으로 나섰다. 나의 피였지만 그 피를 발로 밟는 순간 무언의 저주와 같은 것이 나에게 걸릴 느낌이었다.
이제 살았다, 이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집 밖으로 나오려던 순간 깨달았다. 모친을 살릴 돈을 나의 옆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그 돈이 없다면 지금 집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 돈이 필요했다. 아까의 긴장감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며 나는 나의 방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지 않던 피비린내가 역하게 훅 끼쳐왔다. 사람의 냄새란 끝까지 이리도 역하구나라고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멈칫 서고 말았다.
거북이, 집게 그리고 나.
모든 것이 나의 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나가려는 나를 보면서 모두가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이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모친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들었다. 묵직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나오려는 순간 나의 손에 권총이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어? 라면서 피하려는 순간 나의 얼굴에 번져있는 미소와, 가슴이 피어있는 꽃이 보였다.
‘탕’
‘탁’
‘탁’
총소리가 먼저였을까? 내가 넘어지는 게 먼저였을까? 가방이 떨어지는 것이 먼저였을까?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는 나이고, 나는 이미 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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