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로 놓인 가지런한 그 손을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그냥 바라봤다. 멍하니 마치 거기에 어떤 알 수 없는 것이라도 있기라도 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멍하니 테이블 위로 놓은 가지런한 그 손을 바라봤다.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이는 그 손이 유난히 안쓰럽고, 유난히 시리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내가 그녀를 불쌍하게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고, 그녀는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아픔의 끝에서 홀로 힘들어하다가 이리 내 앞에 와서 초라하게 앉아있는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렇기에 나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그 손을 보면서 안쓰러워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가지런한 손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짠하게 느껴지고, 그녀의 그 손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예전부터 워낙 날씬했던 그녀였지만 손마저 이리도 안쓰럽게 마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그녀의 연락이 없었다면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했을 나에게조차 유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만들고 있었다.
나의 멍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그 가지런함이 살짝 부담으로 다가온 것인지, 그녀는 살짝 손을 비틀었다.
분명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을 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그 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시선을 위로 옮겨갔다.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파리하게 보였다. 몇 해 전까지 내가 봤던, 그리고 지금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기억을 하던 그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흔적만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만일 그녀의 모습을 지금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얼굴만 보고 그녀의 모든 삶이 다 부정적일 것이라 이야기 할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그녀를 기억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안쓰럽고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게 행동을 할 것이 분명했다.
몇 해 전까지,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그녀가 가지고 있을 때까지 그녀의 모습은 그 근본을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고매하고 그러한 것이 담겨 있었다.
무언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 고급스러운 분위기라는 것은 일부러 그녀가 만들어서 풍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녀의 몸에서 저절로 풍기는 그러한 고급스러움이 그녀에게는 존재하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그 고급스러움을 일부러 내는 것이었다면 과거의 그녀의 곁에 그 누구도 남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그녀가 바라지 않는 그런 고급스러움이 풍기고 있었기에 늘 그녀의 주위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분명히 내 앞에 앉아서, 다소곳하게 앉아서 아래 입술을 깨물면서 시선은 자신의 손끝에 향해 있는 여인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였다. 어렴풋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색이나 분위기가 뒤에 어려 있었다. 과거의 그녀가 지녔던 것만큼 그것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자신이 그녀임을 밝히고, 그것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탁하고 굳어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실 그리 고운 편은 아니었다. 보통의 여자가 가질 거라고 생각을 하는 그러한 종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가 헉 하고 숨을 들이쉬며 아무 말도 못할 정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녀의 지금 목소리는 아주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오랜 시간 혼자 지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종류의 목소리였다.
“미안할 거 없어.”
언뜻 들으면 중학생까지도 들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내는 목소리는 용산 역의 노숙자도 내기 버거운 목소리였다.
“지금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아주 오랜 시간 당신에게 연락하지 않고, 당신을 힘들게 한 사람이 나일 텐데, 이렇게 갑자기 연락해서 정말로 미안해요. 당신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
“괜찮아. 크게 바쁘지 않으니까.”
확실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과거의 그녀는 그녀의 분위기 탓에 많은 사람들 주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늘 내가 그녀에게 만나기를 청했었고, 그녀가 나를 만나주기를 고대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주위에 분명 아무도 없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줄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먼저 놀랐으니까. 그녀의 지금 이렇게 변한 이 사실에 내가 먼저 놀라서 나 자신을 추스르기도 바빴으니까.
“당신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거,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는 거, 그 시절에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조금 더 좋았을 텐데. 그랬을 텐데.”
그녀의 입술은 오랜 시간 갈라지고 터지고 한 것을 겪어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갈라져 피가 흐르고 있었건만, 그녀는 그것이 따갑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그녀의 손을 보는 것보다 더욱 민망했다. 그녀의 얼굴에 보이는 것은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내가 기억하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민망했다.
하지만 적어도 손이라는 것은 아무리 달라지고 다시 또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달라지기가 힘든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손을 보면서 놀라기는 했어도, 그렇게 민망하거나 하는 것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놀라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민망했고, 과거 그녀를 추종했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시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가만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과거 그녀의 시절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손톱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다닌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밖으로 보이는 부분을 꾸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남들에게 가장 먼저 보이는 부분은 얼굴이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부분은 손이라고 대답을 했다. 오지랖이 넓은 까닭에 힘든 일도 많이 하고, 거친 일도 많이 했던 그녀였지만 그 손은 전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요리를 좋아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매끄럽고 부드러운 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흙과 식물을 즐기던 사람이라면 응당 있을 만한 손톱 아래 흙의 흔적도 그녀에게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늘 싱그러운 향기만 나고 있었고,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종류의 것은 절대로 그녀에게 그 어느 순간에도 느낄 수가 없었다.
“묻지 않아요?”
“응?”
그녀의 물음에 나는 혼자 가지고 있던 세상에서 벗어나 그녀를 바라봤다.
“뭘 묻지 않는 다는 거야?”
“왜 당신을 찾아왔는지, 그렇게 차갑게 당신을 두고 갔으면서, 왜 이렇게 당신을 찾아온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지도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유쾌함은 다소 남아 있었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 그 유쾌함을 버티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유쾌함이 보였다.
물론 누구나 생각을 하는 그러한 종류의 유쾌함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말을 하는 블랙 코미디라고 해야 할까? 분명히 무겁고, 버거운데 그 속에서 유쾌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유쾌하게 말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사실 자체의 아이러니가 내게 유쾌하다는 생각을 억지로 심고 있는 것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당신에 대한 소식을 어느 순간 들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너무나도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 이럴 거라고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았었어.”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늘 빛이 나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의 소식은 정말 어느 순간 뚝 하고 끊겨 버렸다. 혹여, 내가 상처를 받을까 걱정을 하여 나에게만 하지 않는 것일까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이 끊겼었다.
그녀가 간절히 바라던 사람에게까지 그 연락을 끊을 것을 보면 그녀는 확실히 그 연락을 끊고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그녀를 잊고, 그 일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곤 했다. 우리의 주위에 있는 사람 중에 어느 순간 갑자기 연락을 끊는 사람들을 보면 분명 잘 된 경우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너무나도 잘 된 사람들은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 그 잘 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쯤이면 이미 그 사람들의 소식은 직접 그에게 듣는 것이 아니라 남의 귀를 거치고, 거치고, 다시 또 거치고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소문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도대체 그 시절 왜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어떻게 변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매몰차게 우리로부터 연락을 끊으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그 소식이 우리에게 들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식은 애초에 그녀가 존재하지 않기라도 했던 것처럼, 절대로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부러 우리에게 제 소식을 전하지 않으려고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나는 내가 잘 살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녀는 쓸쓸한 말투로 대답을 했다. 그래도 말을 해서인지,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매끄럽고, 다소 편안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바닷가에 만들어 놓은 모래성처럼 내가 스러질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어.”
나는 그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었다. 사실, 이러한 것 역시 과거의 나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의 잘못을 지적하다니, 이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분명했다.
“알아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없다는 것.”
하지만 그녀는 지금 내 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기억할 뿐,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유난히 하지 못했어요. 그것이 그리도 쉬울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무슨 일.”
그녀는 다소 명랑한 어조로 나의 말을 따라했다. 그녀의 맑고 빛이 나던 검은 눈동자는 살짝 흐려졌고, 그 총기마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에 통통 튀기던 것은 탁하고 거칠어졌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았다.
“사실 나도 알고 있어요. 내가 당신에게 하소연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한 짓을 생각을 하면 나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앞에 앉아 있어도 안 되는 거고, 당신에게 연락을 해서도 안 되는 것이 분명하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이 생각이 났거든요. 당신이라는 사람이 생각이 나서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기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렇지 않게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세월이 지났지만 내가 그녀에게 느끼던 묘한 흥분은 다시금 느껴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건, 혹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건 기쁜 일이었다.
어떻게 기억이 되던, 타인에게 기억이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기억이 된다는 것은 더욱 유쾌한 일이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이겠지만, 사실 다소 통쾌한 부분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그 동안 나는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는 저 위에 얹어져 있는 달과 같이 늘 빛이 나는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에게 감히 다가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끌림에 늘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녀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고, 나는 늘 그런 그녀의 뒤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가 기억이 났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나의 옆에 와서 있었다. 그 뒤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건, 그것이 진실이건, 혹은 거짓이건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 그녀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물론 지금 나를 찾은 그녀는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낡은 모습처럼, 곳곳에 그을린 자국이 있고, 돼지 누린내가 나는 김치찌개의 가게에 그녀가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한복보다는 칵테일 드레스가 어울리는 여인이었고, 칼국수보다는 파스타가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그 과거 시절부터, 그녀는 커피를 마시러 가면 늘 생과일주스를 주문하곤 했었다. 다른 이들은 비싸고 맛도 없는 그것을 왜 그리 비싼 값을 치르고 먹느냐 물었건만,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높이 들었다. 그녀만의 규칙이었고,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그것이 그녀였고, 그렇기에 그녀를 사람들은 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그렇게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모르는, 그녀도 알 수 없는 어떤 그녀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 그녀에게 그런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보자고 한 거야?”
“그냥, 그냥요.”
나의 떨리는 물음에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낮게 대답했다. 그 동안 내가 그녀의 앞에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었지, 그녀가 나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그녀가 나를 차마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녀가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요. 당신 찾아오면 안 된다는 거.”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마치 물안개가 핀 어느 한적한 산 속의 호수를 연상하게 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내가 얼마나 모진 여자였는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생각이 났어. 그래서 연락을 한 거예요.”
“하아.”
사실 그녀가 나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은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녀와 나는 사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 멀다면 멀지, 모르는 사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두 사람은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따랐다는 것 역시 바탕에 깔려 있었다. 늘 그녀의 주위에 사람은 많았지만, 나처럼 그녀에게 모든 것을 걸고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에 대해서 다소 부담을 느끼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깨달았다. 아, 이 여자가, 이 사람이 나를 피하고 있구나. 이 사람이 나를 조금 불편하게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렇게 조금씩 깨달았다. 그러나 한 번 그녀를 향한 마음은, 나의 끝없는 바라보기는 그리 쉽게 끝이 날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밀어내면 밀어 낼수록 힘이 드는 시선으로 바라볼수록 그녀가 좋았다.
“그 때는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과거의 나를 생각하고 있던 순간 그녀는 갑작스럽게 마치 원자 폭탄이라도 터뜨리는 것처럼 낮게 말을 건넸다. 그녀의 그 말은 성모가 내게 강림하신 것처럼 따뜻함을 주셨고, 온기를 담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 미련이 남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너무나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내 앞에 있는 초라한 여인의 고백에 마음이 다시금 설렌다는 것 역시 슬픈 일이었다. 그 마음 자체를 이제는 잊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을 잊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그녀의 존재를 마음에서 지웠지만, 아주 오랜 시간 그녀의 존재는 마음 속에서 살아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깨우는 주문은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말이 들리는 순간 나의 마음이 열렸고, 나의 가슴이 열렸다.
그녀의 그 목소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젖과 꿀보다도 달콤하였으며, 그 어떤 어머니가 해주는 밥보다도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과거 자신을 버렸던 존재가, 나중에 초라하게 변한 후 자신을 바라보겠다고 이야기 한다면 비웃거나 무시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사실 대다수의 사람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사람이라는 동물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라는 부분은 아주 작은 부분만으로도 쉽사리 바뀌고, 다른 감정으로 변하곤 했다.
사랑이나 증오, 미움이나 고마움. 이러한 종류의 감정들은 말 그대로 한 장 차이로, 종이 한 장 차이로 변할 수 있는 종류의 감정들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께서 내게 느끼게 하시려는 그 감정들이 기뻤지만, 반대로 작게나마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가슴 온 가득 느낄 수 있는 설렘은 그러한 두려움을 밀어내고 있었다.
마라톤을 하다보면 일정 지역을 넘어서서는 더 이상 나의 힘으로 달리는 것이 아닌 순간이 있다. 뇌에서 분비를 하는 일종의 마약과 같은 성분에 취해서 달리기를 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밀어냄 역시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하는 행동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일?”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 뒤에는 저 넓은 대륙의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일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모든 것을 끊고, 잠시 지내다 돌아오면 사람들이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것 뿐이에요.”
“하.”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란 말인가?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데 사람들이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일까? 도대체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까? 도대체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이 아닐 지도 몰랐다. 그녀의 행색이 이렇게 초라하게 만든 것은 그 시절 그녀를 빛나게 해주던 사람들이 만든 것일 지도 몰랐다. 그 사람들로 인해서 그녀가 빛이 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러한 생각을 함부로 하지도, 할 수도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를 빛나게 해주던 사람들은 마치 그녀의 빛이 저 하늘에서 빛이 나고 있는 샛별보다도 빛이 나는 것처럼 숭배하고, 박수치고, 우러러 봤다. 그 느낌 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언제까지고 빛이 날 그 빛은, 그 빛을 바라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조금씩 색이 바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우리들은 그녀에게서 나오던 빛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의 빛이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당시의 우리들이 알았더라면 감히 그렇게 행동을 할 리는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과거의 우리들은 그녀의 빛이 다할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그녀의 빛을 바라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것이 결국 그녀를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그 시절의 그녀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사람이라는 건 참 무서운 것 같아요. 사실 나 당신에게 가장 먼저 연락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에게도 연락을 했었어.”
그녀는 너무나도 큰 죄라도 짓고 있다는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그렇게 크게 놀라지 않았다. 사실 나 역시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녀에게 내가 큰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녀가 나에게 그렇게 쉽게 다가올 필요도, 다가올 이유도 없었고, 없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다소나마 마음이 흔들리고 아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머리가 굵고, 조금 더 어른이 되어서,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종류의 아픔은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또 그런 상황이 되고 보니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의 입으로 듣는 진실은 조금 더 아팠고, 조금 더 쓰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그랬어요. 그 시절이 자신들에게 너무나도 힘들고,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래. 그래서 다시는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을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나마 젖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소나마 힘이 빠져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겪는 그녀로는 이 일이 너무나도 버겁고, 너무나도 힘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사실 이런 시련이 닥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을 한 적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말을 한 것처럼, 그녀는 아마 자신이 사라졌다가 돌아온다고 한들 이렇게 모든 것이 바뀌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변한 것은 그녀에게 괴로움을 선사하는 일이 된 것이었다. 그녀의 그 괴로움을 그 괴로움을 겪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겪지 못할 나에게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그 괴로움은 어떤 슬픔의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쓸쓸함이라고 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죽이고 난 사람이, 그런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술 마실래?”
“아니요.”
그녀는 쓸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놈의 술이 뭔지, 그 술 때문에 많은 일들이 생기고, 너무 힘든 일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나 이제 술은 그만 마실래요. 술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어떠한 종류의 위로도 되지 못해요.”
그녀에게 풍기던 위화감은 아마도 알코올 탓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인기와 어울리지 않게 술을 못 마셨다. 아니, 아예 술이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은 그녀가 그나마 소중하게 생각했던 지인이, 물놀이를 가서 죽은 후 벌어졌던 자리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나마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마시는 것에 대해서 추임새를 넣어주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었지, 그녀 자체가 그 행위를 즐긴다거나, 어떻게 행동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그 쓸쓸한 미소 뒤에 감추어져 있는 대륙의 북풍과 같은 것은 시리고, 다시 또 시리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혹시 당신이 마시고 싶은 거라면 마셔도 좋아요.”
“아니야.”
사실 나도 술에 그리 익숙한 편은 아니었다. 아니, 나 역시도 술을 멀리 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 부친은 술을 무척이나 즐기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 뒤가 늘 유쾌하지 못했다. 무언가 남의 물건을 부수거나, 하다못해 살림이라도 부수고 나서야 그 날 곤히 넘어갈 수 있었다. 만일 부친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날이면 어머니의 마음이 산산히 부숴지곤 했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나 그러한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고, 뒤로 피하고, 그렇게 술을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찾아온 건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보고 싶었다고?”
“네.”
같은 한국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어쩜 이렇게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도 이해가 되지 않고 공감이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일까? 그녀가 내가 보고 싶었단 그 말은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밥은 먹었어?”
“아니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보기가 안쓰러워서 식당으로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었는데, 그녀는 정말 배가 고파서 나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이런 나 되게 우습죠? 한심하게 변했죠?”
“아니야.”
나는 누가 봐도 거짓이거나 속이고 있다는 것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그녀는 그것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기라도 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 사실을 부정했다.
“도대체 어떻게 지내기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렇게 살고 있는 건데? 왜 그러는 건데?”
“나도 몰라요.”
그녀 역시 자신의 그러한 운명이 기구하고도 우스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는데 내 마음이 갑자기 분노로 치밀었다.
나는 왜 이 여인을 사랑하였는가?
나는 왜 이 여인을 사모하였는가?
나는 왜 이 여인을 따라다녔는가?
그녀가 이리도 초라하게 변할 것을 알았다면 나는 감히 그녀에게 다가서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의 행색이 이리도 초라히 변할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 과거 그녀의 뒤를 이리도 처절하게 따라다니지 않았을 것이었다.
“후회하죠?”
“응?”
그녀는 마치 나의 마음이라도 읽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살짝 섬칫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느껴진 그런 위화감이 다시 느껴지는 것인가?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이 그녀의 목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놀란 눈, 버둥거리는 몸은 마치 낚시 바늘에 걸린 요령 좋은 물고기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 물고기는 단 한 번도 바늘에 걸린 적이 없는 물고기였다. 물고기가 퍼득이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의 비늘이 바닥으로 떨어져 빛이 나고 있었다. 물고기의 몸에서 나는 빛은 저 하늘의 달보다도 은은하고 아름다웠다.
곧 나는 내 코에 비린내가 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김치찌개를 가져다주는 여인을 보며 미소를 지은 후, 비린내를 즐기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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