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번쩍 떠졌다. 요 근래 휴대전화 알람을 몇 번을 맞추어도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던 내가 어느 날 아침 문득 눈이 딱 하고 떠졌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일까? 하고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니, 아마도 내가 죽기에 가장 좋은 날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출했다.
잉여인간.
요즘 들어서, 가장 많이 나에 대해서 드는 생각이 나의 삶은 바로 잉여라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지 못하는 삶은 더 이상 그 삶에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이 요즘의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자살이었다.
죽음.
무언가를 끝내게 되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때로는 가장 의미있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때로 가장 궁금한 것이 과연 내가 죽음을 맞이하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슬피 울어줄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심지어 나의 부모님조차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실까도 궁금했다.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늘 구박을 하는 부모님의 평상시의 태도로 보아서는 내가 자살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무라면 나무라셨지 무언가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실 일은 만무하게 느껴졌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지 죽음이라는 것, 자살이라는 것이 나에게 한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평소에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이겠지만, 오늘 죽기로 다짐을 한 이상 그 죽음을 더욱 성스럽게 만들어야 했고, 그 죽음을 더욱 아름답게 포장해야 했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앉았다.
아직까지 이불 속은 따뜻했다. 이 겨울에 느낄 수 없는 온기를 방금 전까지 나의 흔적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랜 시간 꿈쩍도 하지 않았던 나의 두꺼운 커튼을 걷었다.
한 겨울의 해라고는 믿기지가 않을 만큼 눈부신 해가 방 안으로 빛을 내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 빛이 따뜻함이나 그러한 종류의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겨울의 시림을 더욱 시리게 만드는데 공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내가 죽기로 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고, 그런 나의 죽음을 마치 해가 축복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기에, 아무리 이 햇볕이 이 겨울의 추위를 돕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겨울의 추위는 따뜻함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차가운 공기는 너무나도 싫었지만, 내가 죽기로 결심을 했던 날이니 만큼, 오늘의 공기는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통해 느껴야 하겠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리고 이제야 내 방의 공기가 꽤나 퀴퀴하고 답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밖의 공기나, 밖의 부산스러움은 나의 삶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 동안 문을 닫고 살았었다.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러한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한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창문을 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문을 열지 않았으면, 창문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서 제 위세를 나에게 드높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잉여인 나도 어느 정도 의지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깟 창문에게 밀려난다는 것은 분명한 수치였고 모욕이었다. 아무리 죽음을 결심한 날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존재에까지 승리감에 도취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결국 끼이익 소리를 들으며 창문을 열자 새로운 공기가 나의 폐 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벽의 비린내와도 같은 것이 코로 들어오자 살짝 불쾌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 일찍 이 공기를 맡은 것은 과거 내가 학생시절, 그것도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 이후로는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의 공기는 무거움이 감돌면서도 신선함을 담고 있었다. 이 시간에 공기를 들이쉰 사람들은 분명히 잠에서 깨고 정신을 차릴 수 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 시간의 공기는 분명, 이 시간의 공기를 마시는 사람에게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이러한 느낌을 풍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한참을 공기를 들이쉬고 있는데 저 멀리, 학생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이른 시간에 학교에 가는 저 아이들에게는 분명히 어떤 꿈이 있기에 저런 피곤함이나 힘듦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나는 그러한 그들을 보면서 쓸쓸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저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무언가에 매진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청년실업이라는 결과와 잉여라는 하나의 나의 삶에 대한 후회밖에 없었다.
저 시절 내가 열심히 노력하던 것은 그저 과거의 영광이었고, 오늘날 나의 삶의 질이나 여타의 것들에게 전혀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던 분야가 된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씁쓸하지만, 부디 저들의 삶은 나의 삶과 달라, 저들의 삶은 지금 저들이 꿈을 꾸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되기를 나의 마지막 날 나는 낮게 빌었다.
그렇게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빌어주고 나자, 오랜 시간 나의 친구이자 동료로 머물러주었던 컴퓨터에 시선이 옮겨갔다. 많은 시간을 이 컴퓨터와 함께 했었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을 함과 동시에 구매를 했던 이 노트북은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이끈 분홍색이었다. 남자인 내가 분홍색을 가지고 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신기함에 대상이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인간의 표상으로도 비춰지기도 했다.
물론 이제는 너무나도 오래되어서 처음 샀을 때의 그 느낌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이 가고 기계지만 마음이 가는 상대였다. 늘 아침이면 일어나 컴퓨터에 전원을 올렸지만 오늘은 이 컴퓨터도 쉬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오래 써서 비록 그 배터리가 12분밖에 가지 않는 녀석이지만 한 때는 130분도 넘게 가는 긴 수명을 가진 녀석이었다. 이 녀석의 짧아진 수명처럼 나의 수명 역시 점점 짧아지고, 희망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 역시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이 괴로움이나 이 삶 등이 점점 나에게 버거워지자, 나는 희망 없이 사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사실 나는 그 동안 죽지만 않았다 뿐이지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희망이 없는 삶, 어떠한 목적이 없느 삶은 분명히 죽어버린 존재의 삶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의 나의 삶이었다.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겠다는 목적조차도 없었다.
나는 실패한 인생이었고, 나의 실패는 계속된 좌절로 나에게 다가와 나의 목을 조르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나의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벽에 걸린 상장을 바라봤다. 저 상장이 내 방에 걸리던 순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 삶에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 단 하나의 의심도 품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나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은 모두 미더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언젠가 내가 분 명히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런 생각은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 그 똑똑하던 나는 왜 아무리 반짝이고 강한 빛을 발하는 별도 언젠가는 수명이 다하게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그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던 나에게 별의 수명의 끝은 하나의 충격이었고,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영광은 별의 폭발과 함께 가장 화려하게 빛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무언가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인 자국이 있는 촌스러운 페인트가 칠해져있는 문에 손을 가져가자,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는 도마뱀의 꼬리와 같은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 도마뱀의 꼬리의 숨결을 듣기위해서 나는 귀를 가져갔고, 거기에서는 더 이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친과 부친 모두 다른 이들이라면 자식이 주는 용돈을 받아서 편하게 살 나이였지만, 미더운 아들을 둔 덕에 아직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늘 그 부분이 죄송스럽고,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그러한 마음도 하루 이틀이 고작이었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자, 이제 그런 부분에 대해서 미안함이 들기보다는 자꾸만 짜증이라는 것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내가 못나서 내가 부족해서 내가 그러한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모들처럼 뒤를 봐주지 못하는 부모를 둔 덕에 내가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에야 물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고 있지만, 그것은 내가 죽기로 생각을 한 오늘에서야 난 생각이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돌리고 문을 열자, 나의 삶처럼 끼익 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조심스럽게 집으로 발을 내딛자, 나의 나이와 똑같은 허리가 굽은 행운목이 눈에 들어왔다. 부엌으로 가자 그렇게 내가 아침을 챙겨 먹지 않거늘 늘 모친이 준비해두는 아침이 보였다. 그리고 순간 마음 한 구석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솟는 것이 느껴졌다.
꽁치.
나는 이상하게도 꽁치 통조림이 너무나도 좋았다. 비린내도 적고, 가시를 바를 필요도 없는 그 통조림이 나는 너무나도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모친이 꽁치를 넣고 끓여진 김치찌개를 참치나,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보다 훨씬 맛있게 먹었던 나였다.
그런 나의 식성을 아직까지 알고 있는 모친이 끓여놓은 꽁치가 들어간 김치찌개를 보자 묘하게 눈물이 흐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모친이 나에게 주려고 하는 정을 내가 죽기로 결심을 한 날 이전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내가 이렇게 잉여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그 삶을 끝마치려고 하기 전에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나는 오늘 자살을 하기로 결심을 했고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을 했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무리 모친의 정성이 마음으로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이 마음을 받을 수도, 받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눈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겨우 모친이 준비해 주신 아침에서 시선을 떼자 다시 객관적으로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어디에도 쓸 수 없는 분명한 잉여였고, 그런 나에게 오늘은 자살하기 좋은 날이었다.
문득 나의 눈에 새하얀 종이가 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무언가 순서를 적어두고 천천히 거기에 따라서 죽으면 참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아직 충분히 이른 시간이었다.
이런 계획을 세우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면 어떻게 하나 생각을 했는데 다행이었다. 나는 팬을 찾아 뒤적이다가, 과거 내가 가장 빛이 나던 시간에 나의 빛을 돋보여주던 이탈리아에서 사온 만년필을 발견했다. 한 때, 소설가라는 직업과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나에게 그 펜은 새로운 의미였다.
내가 그 시절 그 펜으로 나의 죽음에 대한 시간표를 짜게 될 줄 과연 누가 알았을까? 그 소중한 만년필로 나의 자살에 대해서 계획을 적게 될 것이라고 과연 어떤 존재가 떠올릴 수나 있었을까?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나조차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니까.
매끄럽게 잉크가 흘러나오는 만년필은 분명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나의 삶이 이리도 술술 풀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새햐안 종이에 오늘의 계획을 쓰기 시작했다.
서걱서걱하면서 펜이 글을 쓰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것이 참 기분이 좋았다.
8시. 기상 및 아침 식사.
9시. 목욕.
여기서 목욕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오늘이 나에게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깨끗하게 몸을 단정히 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람이 죽게 되면 몸에 모든 것을 벗긴 이후 죽은 자의 옷으로 갈아입히는데 그 순간 내 몸이 더럽다면 그처럼 수치스럽고 그처럼 부끄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나를 위해서 절대로 용납을 할 수도, 용납을 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었다.
목욕을 얼마나 할까 고민을 하던 나는 깨끗하게, 그리고 정갈하게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집에서 그 모든 의식을 행해야 하는 만큼, -물론 나는 단 한 번도 대중목욕탕에 간 적이 없었다. 무언가 불결하고 무언가 불쾌한 곳이 바로 대중목욕탕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거기에 할당해야 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기에 나는 목욕을 하는 데에 시간을 두 시간 정도로 잡기로 다짐을 했다.
10시.
그리고 잠시 망설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침 10시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다른 살마들이 무엇을 할 지가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시간에 회사에 있으면서 업무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경우 그 시간에 자신의 또 다른 꿈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펜을 움직이고 있을 것 역시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다른 사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도대체 이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가 나로써는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고, 전혀 알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과연 나와 같은 사람들은 이 시간에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몇 번 펜을 두들겨 보던 나는 다소 과감한 생각이 들었다. 외출.
아주 오랜 시간 나에게 외출이라는 단어는 금기와도 같은 단어였다. 잉여의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외출은 날카로운 자극이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삶의 비교는 나를 초라하게 느끼게 하는 부분이었고 그러한 부분은 나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주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잉여의 삶이 시작된 이후로는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도 보지 않기 시작했고, 그렇게 즐기던 쇼핑도 딱 끊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자살을 하기로 결심을 한 날이었기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과거 내가 행복하던 시절에 했던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나는 순간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러한 일들을 하기 위해선 사회적 합의에 따라서 돈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는 나에게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집에서 놀고만 있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신 모친께서 가끔씩 내게 돈을 건네주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가서 나의 지갑을 열어보니 내가 오늘 하려고 마음을 먹은 10시에 할 일을 하기에 충분한 액수의 금액이 들어있었다. 그리 큰 일은 아니었지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행복이라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정말로 아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어서 내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 오늘은 자살하기 좋은 날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오늘을 살기 좋은 날로 만들어주어야 할 의무와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의 머리에서 노숙자들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에 다니던 시절 역사에서 보았던 그 노숙자들은 너무나도 불결했다. 그렇기에 어린 나는 그들을 매몰찬 시선으로 노려보았고, 그들에게 있는 힘껏 불쾌하다는 눈길로 바라봐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나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주었다. 오늘에서야 나는 그 시선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너도 똑같아. 라는 그 시선을 그 시절 나는 왜 몰랐던 것일까? 혹시라도 그 시선에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다시는 그러한 시선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시절 나는 그러한 시선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없는 아이였고, 결국 이 나이가 되어서 잉여의 삶이라는 것을 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점심을 먹는 일일 것이다. 아침을 늦은 시간에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점심을 거르는 것은 내가 용납을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평소라면 배가 고프지 않을 경우 그냥 밥을 먹는 것을 가볍게 건너 뛸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내가 자살을 하기로 결심을 한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의 평범한 삶처럼, 과거의 내가 즐길 수 있었던 시간처럼 시간에 맞추어서 딱딱 돌아가는 것이 더욱 즐겁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나는 점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시간에 제대로 먹어야 한다는 확고한 다짐과도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점심은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다. 두 시간,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충분할 것이었다. 그러나 점심으로 무엇을 먹어야 할지는 아직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과연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그 날 점심으로 무엇을 먹는 것일까? 자살을 하는 날 점심으로 무엇을 먹어야 후회를 하지 않고 행복하게, 자신이 생각을 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일단 내 주위에 자살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자살을 한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이기에 그 사람에게 무엇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혹, 자살을 결심해서 그 날 무슨 일을 한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또 다른 의미의 실패자가 아니던가?
죽음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한 그런 머저리가 아니던가? 나는 그러한 사람들의 조언과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자살하기 좋은 날이었다. 그리고 이 좋은 날 나는 반드시 아름답고, 빛이 나는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그 동안 살아온 나에 대한 예의였다. 비록 지금은 그 빛을 잃고 말았지만 적어도 과거의 한 순간은 영광스럽게 빛을 낼 수 있었던 나에 대한 영광이 바로 그러한 죽음으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버겁고, 나의 목숨이라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 굴레를 벗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을 했고, 그렇기에 죽음을 결심하고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점심은 뷔페, 그 정도로 정하고 그 이후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점이라는 생각이 머리로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집에 앉아 있으면서 책이라는 책은 그 어떤 책이라도 읽은 적이 없었다. 나의 꿈이 과절이 되었던 것이었고 책은 더 이상 내게 즐거움이 아닌 고통을 주는 분야였다
.
그러나 오늘은 내가 자살을 하기로 결심을 한 날이었다. 그런 날이니 오늘은 그렇게 나에게 괴로움을 주던 책 역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았다. 이 자신감의 근원은 그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묘한 확신감이 온 몸에 퍼졌다.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면 굳이 이 믿음을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는 일도 없었겠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었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분야의 일이었다. 자살이라는 것은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 확실한 모양이었다. 비록 그 변함이 자살이라는 자신의 마지막 날 벌어진다는 것이 꽤나 애석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떠한가? 자신의 최후의 날이라도 이렇게 멋지게, 더욱 나은 삶으로 변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나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도 내가 오늘 죽기를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에라도 자살을 결심하고 이 사실을 깨달았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나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서점에 다녀온 후로는 책을 사서 근처에 있는 미스터도넛에서 커피와 함께 책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기고 싶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소중한 보물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정말로 그 책이 나에게 그러한 종류의 의미를 주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실 이 이상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죽는데, 이 정도 일을 하면 족하지 아니한가? 순간 나는 아직도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일은 너무나도 오랜만이었기에,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장소에 아직도 극장이 있을지 조차도 사실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워낙 상권이라는 것은 바뀌기 쉬운 문제이기에, 내가 알고 있던 그 극장이 더 이상 그 장소에 없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순간 그 동안 내가 특정 극장에 간 것은 그저 포인트를 모으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내가 자살을 하기로 결정을 한 날이었다. 내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포인트 따위를 모을 생각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모든 일의 장소는 부천역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이 모든 일들을 다 하면 오후 6시나 7시 무렵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다시 한 번 나는 고민에 휩쌓였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가족사진에 시선이 옮겨졌다. 아주 어릴 적, 정말 아주 어릴 적 찍었던 그 사진 속의 부모님은 젊고 아직까지 무언가가 가득 담겨 있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보이고 계셨다.
그리고 분명히 초등학생으로 기억이 되는 당시의 나 역시 밝게 미소를 지으면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면서 마음 속 한 구석이 묘하게 싸해오던 그 순간, 부모님에게 무언가를 해드려야 한다는 의지와 같은 것이 마음속부터 차올랐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해드려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과거 내가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에 만들어드린 아주 간단한 음식과 아주 작은 케이크로 부모님께서 미소를 지어주셨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오늘은 내가 자살을 하는 날이었으니까, 더 이상 거창한 의미를 주지 않더라도 부모님께서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시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실 것이 분명했다.
그래 어차피 죽어서 황천으로 가는 몸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더 나은 아들의 마지막을 보여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와 지갑을 들고 잠시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말을 한 후, 집 밖으로 나와 아주 오랜 시간 타지 않았던 나의 차에 올라타,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연탄에 불을 붙여 그 연기를 마시면 모든 일이 간단하게 끝이 날 수 있었다.
나의 인생에서 오랜만에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하니 온 몸이 저릿저릿 저려왔다. 이 행복감, 이 짜릿함.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만족감.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이 일을 왜 그 동안 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왔다. 어차피 할 것이었다면, 어차피 이렇게 될 문제였다면 진작 자살이라도 할 것을. 그렇다면 부모님은 더 이상 나 때문에 속을 썩지 않으시고 편하게 늙으실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생각에 잠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오늘 하루는 정말 바쁜 하루였다. 내가 써놓은 오늘 하루를 바라보자 정말 자살하기 좋은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 누가보더라도 이 정도라면 충분히 자살하기 좋은 시간표였다. 누가 말을 한 것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떤 이는 인류 최후의 날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을 하지 않았던가? 나는 사과나무까지는 심지 못하더라도, 내 몸을 썩혀, 이 몸을 비료로 삼아 대지를 풍요롭게, 대지를 기름지게 만들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었고, 이 세상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이제 슬슬 모든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려던 순간,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언. 유언장.
이것을 아직 작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그저 형식에 그치는 문제였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죽음에 대해서 어떤 해명이라던가, 부모님의 마음을 놓이게 해드릴 무언가를 해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불효가 될 것이었다. 비록 나는 이 세상에서 몸을 뜨지만 부모님께 불효는 차마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렇데 된다면 오늘 자살한 것이 너무나도 후회가 되고, 오늘의 자살을 엎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유언이라는 것은 어떻게 써야하는 것인가? 그 근본적인 문제에 다다르자, 순간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킬 수 밖에 없었다. 생각을 해 보니, 아직까지도 나는 그 누구의 유언장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유언장을 보는 사람은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친해야지 그 유언장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일까?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내가 그렇게 위대한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죽음, 삶. 그 경계에 있는 유언. 산 사람이 죽음을 생각을 하며, 그 이후에 대해서 준비를 하는 것이 바로 유언이었다.
그러나 아직 산 사람들이 과연 그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을 하고 그렇게 작성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죽음과 삶은 분명한 대립이었고, 분명한 극이었으며, 분명히 함께 할 수 없는 일종의 라이벌과도 같은 존재인데 말이다.
그러한 일이 가능한 사람은 오직 가장 아름다운 날 자살을 하는 사람 밖에 없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가장 명확하게 알며, 그 죽는 날 그 기분이 자신의 인생 최고로 행복한 사람만이 그 죽음의 행복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오늘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유언장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한 후, 펜을 움직였다.
‘그 동안 아무 것도 해드린 적 없는 바보 같은 자식이라 너무나도 죄송합니다. 늘 더 좋은 자식이 되고 싶었고, 더 많은 것들을 부모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족한 제 탓에 그런 것들을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부모님에게 힘든 일을 시키는 불효막심한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랜 시간 저 같은 것을 키워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만일 제가 저 같은 자식을 길렀다면 진작 포기했을 것인데, 저를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정말 아무 것도 없으나 모두 부모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 얼마 되지 않는 것들, 몇 안 되는 나의 모든 물건들을 가지고서라도 때로는 나쁜 놈이라 욕을 하시고, 한 번이라도 아, 내 아들. 이라는 생각만 해주신다면 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동안 이 세상에 잠시 내려온 기간 동안 저를 보살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그 은혜 다 보답하지 못하고 이리 먼저 가는 불효막심한 자식에게 손가락질 하셔도 부디 본인들을 책망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부모님께서 부족하셔서 제가 이리 죽음의 길로 걷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가 너무나도 부족하단 것을 알고 있기에 죽음의 길로 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지만 제 유언을, 사실 유언이라고 하기에 너무나도 부끄러운 이 편지를 읽으시는 부모님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아프실까 하여, 이만 글을 줄이고자 합니다. 여태까지 이 못난 자식을 키워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자 가슴 한 켠이 먹먹하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로 죽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온 몸을 감돌자 살짝 찌릿한 것이 통했다.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고, 마침내 그 죽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는 순간은 행복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고, 너무나도 기뻤다. 그러나 그 마음 한 구석, 그 마음 한 켠에 있는 텅 빈 공허감을 어떻게 막을 길이 없었다.
이 부분은 어떻게 해서 막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공허함이란 것은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이 공허감을 없애기 위해서는 내가 죽는 것이 유일한 수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죽음, 그 이후의 차가운 공기가 나에게 공허감을 상실하게 해줄 가장 좋은 선물이었다. 나는 그 동안 단 한 번도 믿지 않았지만, 신이라는 존재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아침 저절로 눈이 떠지게 만들어서 자살하기 좋은 날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신 그 분께, 그 절대자라는 존재께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 존재의 표현이 어떠한 종류인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오늘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오늘 내가 죽어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그 분이 너무나도 감사했고, 너무나도 고마웠다. 이제 다 되었다. 라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후련했다.
유언장을 곱게 적고, 마지막 아침 식사인데 따뜻하게 먹고 싶었다. 천천히 가스를 켜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은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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