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단편 소설

기차 1. 죽음의 기차

권정선재 2010. 9. 27. 07:00

 

기차 1, 죽음의 기차

 

 

오징어 하나 주세요.”

값을 치르고 턱하니 철권 게임기 앞에 앉았다. 오징어를 사기 전에는 고객을 위해서 자리를 비워야 한다던 역무원도 더 이상 아무런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놈의 오징어가 이렇게도 질긴 것인지. 그리고 또 저지방 바나나 우유는 팔지 않는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남자친구에게 노랑 장미를 받고 이별을 하자는 거냐고 싸우고 도망치듯 지하철도 아닌 기차 입석을 택한 멍청한 나에게도 화가 날 따름이었다.

무엇을 드릴까요?”

, 저기 구운 계란하고 사이다 하나 주세요.”

씹히지도 않는 오징어는 자리에 두고 다시 카운터에 가서 구운 계란과 사이다를 샀다. 무엇을 품거나, 무엇이 될 지도 몰랐던 계란의 껍데기를 까면서 멍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기차는 덜컹거리지, 자리는 없지, 철권 게임기 앞에 앉아 있어서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게임을 한다고 하면 비켜줘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천안까지 가기는 해야 했으니까. 게다가 이미 표도 끊어 놓았고 기차가 시간도 덜 걸렸다.

어릴 적 나는 기차를 참 좋아했다. 부산에 사시는 외할아버지는 늘 영등포역으로 내리셨는데, 항상 손에는 호두과자가 들려 있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내가 외할아버지를 좋아한 것인지 외할아버지가 사오시는 호두과자를 좋아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도 기차를 생각하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는데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시간을 보아도 아직 역에 도착을 할 시간이 아니었는데, 안내 방송이 나온다. 신호 대기 관계로 잠시 정차를 한다고 한다. 이래서 나는 무궁화호가 싫었다. 늘 기다리고 딜레이가 되는 열차였으니까. 항상 누군가에게 양보만 하는 그 꼴이 너무나도 보기 싫었다.

얼마나 서있었을까? 기차는 다시 힘겹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에 도착을 하고 그 누구도 철권 게임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다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평택만 서면 더 이상 스는 역이 없이 바로 다음은 천안이었으니 잘 하면 이 자리에 그냥 앉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이란 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법.

대학생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이 쭈뼛쭈뼛 이리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비켜 달라고 할까? 하지 않을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시선을 이리로 곧장 하고 오는 것을 보니 여기에 앉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비켜달라고 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고, 그런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20분 남짓의 시간만 버티면 되는 것이니까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다른 객실에 자리가 있나 연결 부분을 건너는 도중 싸우는 커플을 발견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싸우는 것일까? 잠시 한심하게 그들을 바라보다 곧 부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그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싸움을 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해서 무엇이 불만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고 그것이 풀리면 더 이상 싸움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 그러나 그와 나는 대화가 없었다. 연인이라고 하지만 그저 형식적인 이름에 더 이상 아무런 것도 보태지지 않은 그냥 그러한 것뿐이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에 살짝 부러운 시선을 던지며 나는 옆 칸으로 옮겨갔다. 빈 자리는 없었지만 사람이 단 하나도 서 있지 않았다. 방금 전 열차카페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들어서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객실을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것일까? 이렇게 비어 있는 객실인데 아무도 오지 않다니.

가는 방향의 맨 뒷자리 뒤의 빈 공간에 조심스럽게 몸을 밀어 넣었다. 누구와도 부딪힐 염려가 없기에 살짝 안도감이 드는 자리. 이제 곧 도착을 하겠지 하고 창밖을 보는데 시간이 늦어서인지 날씨가 흐려져서인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는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전이라면 이렇게 헤어지고 난 이후라면 5분도 안 되어서 전화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시간이 넘도록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는, 정말 그 노랑 장미의 의미와 같던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토해졌다. 괜스레 쓸쓸했다. 항상 내 사람이라고 믿었던, 항상 나의 곁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 사람이 나를 떠난다는 거였다.

나쁜 놈.”

정말 연락 하나 없는 것일까? 그와 만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영화제에서 여러 번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을 계기로 사귀기를 시작했고, 그 영화제가 끝난 지 아직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무리 긴 사랑이 없다고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그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머리까지 차올랐다. 그냥 이대로 참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약이 올랐고 내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나는 바보도 아니었고, 그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만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에게 따지기 위해서 휴대전화를 꺼낸 순간 나는 적지 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휴대전화가 그대로 나가 있었다. 오늘 아침에 충전을 한 전화기였기에 벌써 방전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기에 가방에서 예비 배터리를 꺼내서 전원을 눌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완전히 충전이 된 것을 가방에 넣어두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마음이 초조해지니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가방에 전화기를 도로 넣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휴대전화를 AS라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순간 당황했다. 창밖의 풍경이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까맣게 물들어 있기만 했다. 게다가 시간을 생각을 해보았을 때 진작 천안역에 도착을 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 뭐야 이거?”

나는 조심스럽게 내가 있던 공간을 벗어났다. 그 순간 나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이 객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제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심지어 작은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고요했고, 너무나도 섬뜩한 침묵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 저기요.”

조심스러운 나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퍼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가 있던 자리의 바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봤다. 바로 앞자리만 바라보며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는 여자는 내가 아무리 그녀를 바라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투명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치 혼이라도 나간 시체 같았다.

이거 뭐야? 도대체 뭐냐고.”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면서 객실의 문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더듬어도 아무런 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점점 더 숨이 막히고 점점 더 초조해졌다. 땀이 흐르고 더 열심히 손을 더듬었지만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거의 흐느끼기까지 하면서 열심히 손을 더듬었다. 공포심은 점점 더 크게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자 나의 눈에 한 가지가 보였다. 내 앞의 객실의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눈이라면, 나조차도 무심히 넘겼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던 문고리는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느끼지 못 했던 차가운 기운이 거기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숨조차 들이실 수 없을 만큼 공포가 온 몸에 느껴졌고, 이가 부딪힐 정도로 오한이 들기까지 했다.

, 거기 누구에요?”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로 퍼졌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문고리가 잡히지 않았다. 문이 열려야 나갈 텐데, 그래야 나갈 수 있을 텐데.

등을 돌리는 순간 내가 상상도 하지 못 하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 감히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문은 점점 더 크게 열리고 있었고 차가운 기운은 점점 더 많이 느껴지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아무나 나 좀 살려주세요.”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그저 사람이 많아서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저 잠시 여유를 찾아서 객실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제발, 제발 누가 좀 살려주세요.”

문이 열리고 그 문을 열고 있는 형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르브낭처럼 보이는 그것은 얼굴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있어야 할 곳은 뻥 뚫려 있었고, 코는 흔적도 없었으며 입은 길게 찢어진 채 웃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아무나 좀 나, 나 좀 살려줘요.”

나는 미친 사람처럼 문을 두드렸다. 이 정도로 두드리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는데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 제발, 누군가가 이 문소리를 알아차리기를 바라면서 나는 더욱 열심히 문을 두드렸다. 손이 아픈 것도 몰랐다. 지금 이 순간 살아나가기만 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하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냉기는 점점 더 깊게 나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에 두려움이 앞서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지만 삶이라는 단어는 점점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고, 죽음이라는 낯선 냄새만 나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문은 점점 더 많이 열리고 있었고 조금만 더 있으면 문이 완전히 열릴 것이었다. 지금 이 기분은 마치 연못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그맣고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지만 너무나도 깊은, 그 깊이도 알 수 없는 연못에 온 몸을 들이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발 살려주세요. 나 좀 살려줘요!”

그 순간 뒤에서 철컥 소리가 났다. 그리고 쏟아지듯 나의 몸이 뒤로 쏠리면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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