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로그 창고/블로그 창고

추억에 살다. - [스물세 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9. 2. 16. 00:10

 

 

 

추억에 살다.

 

 

스물세 번째 이야기

 

 

 

오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니?

 

부탁?

 

.

 

민용이 고개를 갸웃하며 신지를 바라봤다.

 

무슨 부탁인데?

 

민정이 말이야.

 

신지의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그냥 윤호에게 보내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오빠를 가지겠다는 그 따위 말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야. 오빠의 마음이 나에게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윤호가 너무나도 안쓰러워서 그래.

 

“…….

 

민용은 입을 다물었다.

 

오빠도 오빠 조카 윤호 너무나도 많이 예뻐했잖아. 그랬었는데 왜 이렇게 바뀌어 버렸는 지 모르겠어.

 

걔가 모든 걸 다 망쳤잖아.

 

어째서?

 

걔가 날 흔들리게 했어.

 

아니.

 

신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윤호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

 

신지가 민용의 눈을 바라봤다.

 

결국에 흔들린 건 윤호의 말 때문이 아니라, 오빠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오빠도 윤호가 그런 말을 해주길 바랐을 거 아니야. 오빠 더 이상 윤호의 탓을 하지 마. 윤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하아.

 

민용이 한숨을 토해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오빠.

 

하지만 지금 확실한 건 말이야.

 

민용이 신지를 바라봤다.

 

너는 내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하아, 그런 거구나.

 

신지의 눈이 쓸쓸하게 빛났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오빠의 마음 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구나.

 

미안하다.

 

아니야.

 

신지가 고개를 저었다.

 

오빠의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없을 거라는 거 미리부터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거니까 말이야.

 

신지가 조심스럽게 배를 어루만졌다.

 

오빠.

 

?

 

얘는 내가 키울 거야.

 

뭐라고?

 

민용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자 혼자서 애를 어떻게 키우겠다는 거야?

 

민정이와 함께 지내기로 했어.

 

?

 

민용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 지금 그게 무슨 의미야?

 

무슨 의미긴?

 

신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나 일단 민정이랑 같이 살기로 했었거든, 그런데 아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서 선생 그대로 한국에 있는 거, 확실한 거야?

 

그래.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발 있어달라고 부탁을 했어. 그래서 민정이도 그러겠다고 말을 했고 말이야. 오빠도 들었잖아.

 

너 미쳤어?

 

아니.

 

신지가 빤히 민용을 바라봤다.

 

내가 왜 미쳤다는 거야?

 

결국 모든 걸 다 원래대로 돌리려고 하는 거야?

 

내가?

 

신지가 코웃음을 쳤다.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말을 해도 오빠는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돼지.

 

?

 

우리 두 사람 헤어지지 않으면 애초로 돌아갈 일 자체가 없는 거잖아.

 

신지가 슬픈 눈으로 민용을 바라봤다.

 

우리가 원래 대로 돌아가는 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오빠의 탓이야.

 

하아.

 

민용이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서 이렇게 복수하려고?

 

?

 

신지가 민용의 눈을 바라봤다.

 

복수라니?

 

맞잖아.

 

민용이 신지를 노려봤다.

 

좋아. 네 말대로 나도 서 선생에게 더 이상 미련 가지지 않을 테니까 서 선생 그냥 보내라.

 

?

 

서 선생 계속 힘들게 하고 싶어?

 

.

 

신지가 코웃음을 쳤다.

 

오빠는 내가 아프고 슬픈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민정이가 힘든 건 그렇게 신경을 써?

 

당연한 거 아니야?

 

어째서 당연한데?

 

신지가 따지 듯이 물었다.

 

어째서 나는 바보처럼 계속 아파도 되는 거고, 민정이는 아프면 안 되는 건데? 왜 그런 건데?

 

이런 이야기 하지 말자.

 

민용이 신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너 지금 이렇게 옹졸하게 구는 거 너무나도 우스워,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 거 웃음이 다 터지려고 한다고.

 

그러면 웃어.

 

신지가 무표정하게 민용을 바라봤다.

 

오빠가 웃음이 나오면 웃으라고.

 

.

 

오빠 그렇게 생각할 거 하나 없는 거잖아.

 

신지가 민용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봤다.

 

더 이상 오빠가 민정이에게 다가가게 두지 않을 거야. 나는 윤호와 민정이가 잘 되기를 바라.

 

그럴 일 없을 거야.

 

아니.

 

신지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에 민정이랑 윤호 두 사람, 정말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오빠가 그 두 사람 갈라 놓는 거 싫어.

 

단순히 네 욕심이야.

 

욕심은 지금 오빠가 부리는 거야.

 

신지가 살짝 침을 삼켰다.

 

오빠도 알고 있잖아. 오빠 절대로 민정이 오빠 품에 안을 수 없어. 만일 품에 안는다고 하더라도 민정이 너무나도 힘들어 할 거야. 그 사실을 모르는 거야? 민정이가 아플 거라는 거 모르는 거야?

 

네가 아플까봐 그러는 거잖아.

 

민용이 차갑게 말을 했다.

 

괜히 너의 불행 탓이면서 서 선생 핑계 대지 마. 역겹고 옹졸해 보여.

 

.

 

신지가 코웃음을 쳤다.

 

오빠 눈에는 그렇게 밖에 안 보이는 거니?

 

그래.

 

민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에는 그렇게 밖에 안 보여.

 

오빠는 그런 사람이구나.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런 사람이구나.

 

몰랐니?

 

. 몰랐었어.

 

신지가 살짝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몰랐었어.

 

너 바보구나.

 

그렇네.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바보네.

 

신지가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그 동안 바보인 나랑 살아준 오빠도 정말 대단하다.

 

그러네.

 

하아.

 

신지가 한숨을 토해냈다.

 

우리 그 동안 짧지 않은 시간은 서로 함께 했었으면서도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도 몰랐었던 거 같아. 서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서로가 또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 지 말이야. 우리 너무 몰랐어.

 

그래. 정말 몰랐어.

 

그래, 그거 참 다행이다.

 

신지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렇게 너무 늦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지만 말이야. 오빠에 대해서 모두 알게 되었다는 거, 이제 오빠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는 거, 더 이상 오빠에게 미련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거, 그거는, 그 사실 하나만큼은 정말로, 진실로 다행인 거 같아. 너무나도 다행이야. 지금 이렇게, 너무나도 아프면서도 지금 이렇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인 거 같아. 너무나도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제라도 확실히 알았다는 거,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을 만큼 알게 되었다는 거, 그거 참 다행이야.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지금 오빠와 이야기 나눈 걸로 확실하게 더 이상 오빠에게 미련을 가지지 않을 거 같아.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그 동안 솔직히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쉽게 확신하지 못했었어. 정말, 진짜일까?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혼자 미련을 가지고 진짜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신지가 민용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마음 속 깊숙이부터 오빠를 지워낼 수 있을 거 같아.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제대로 알게 된 거 같아. 절대로 오빠는 평범하게 사랑을 하지는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오빠라는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내가 너무나도 바보 같지만 말이야. 그래도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지는 않겠어.

 

신지야.

 

걱정하지는 마.

 

신지가 싱긋 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괜히 오빠에게 매달린다거나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야.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거야. 더 이상 오빠에게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게 되었어. 오빠는 어떤 지 알게 되었으니까.

 

신지가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

 

.

 

고마워.

 

뭐가?

 

더 이상 내 시간 낭비하지 않게 해줘서 말이야.

 

신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

 

신지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더 이상 오빠에게 미련이 안 남았어.

 

신지가 민용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혼해줘서 고마워.

 

!

 

더 이상 오빠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될 거 같아.

 

신지 너.

 

진심이야.

 

신지가 싱긋 웃었다.

 

이제 더 이상 이민용의 부인 신지이고 싶지는 않아.

 

신지가 씩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냥 신지야.

 

신지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