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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살다. - [스물네 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9. 2. 17. 00:07

 

 

 

추억에 살다.

 

 

스물네 번째 이야기

 

 

 

내가 너를 억압했다거나, 네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했다, 뭐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야?

 

민용이 당황하며 말하자 신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야. 오빠는 나에게 너무나도 잘 해주었어. 오빠는 정말 최고의 남편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신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오빠의 반응 되게 웃긴 거 알아?

 

뭐가 웃긴데?

 

.

 

신지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지었다.

 

마치 내가 오빠에게 이혼을 하자는 말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을 하고 있잖아. 오빠가 말을 했으면서.

 

!

 

민용의 눈이 흔들렸다.

 

나는 오빠를 힘들게 한 적 없어.

 

신지가 미소를 지었다.

 

오빠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왜 이민용의 남편 신지가 아닌, 그냥 신지로 살고 싶다, 뭐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 동안 네가 네 이름을 살지 못했다는, 그런 그 비슷한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봐. 그 동안 내가 신지로 살았다고 생각하니? 그건 솔직히 오빠도 아니라고 생각하잖아. 그 동안 내가 살아온 걸 봐. 애미야. 준이 엄마. 나는 단 한 번도 나이지 않았어.

 

다른 여자들도 다 그렇게 살아.

 

나는 싫어.

 

왜 너만 다르려고 그래?

 

민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너만 특별하려고 하냐고.

 

나니까.

 

신지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

 

민용이 코웃음을 쳤다.

 

너 정말 이해 안 가.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바로 오빠야.

 

신지가 민용의 눈을 바라봤다.

 

지금 내가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니?

 

!

 

민용의 눈이 흔들렸다.

 

오빠가 이혼을 하자고 말을 한 거잖아. 나는 오빠에게 아무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오빠가 내게 이혼을 하자고 말을 해 놓고서는 왜 나에게 이러는 거야? 오빠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오빠가 먼저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끝내자고 말을 해 놓고서는 이렇게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야? 이런 오빠 정말 이상하고 어색하다는 거 알아? 지금 너무나도 웃기다고.

 

그래. 인정해.

 

민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지금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어?

 

오빠는 어린 아이야.

 

신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의미야?

 

오빠는 지금 나도 사랑하고, 민정이도 사랑하고 있어. 어느 한 사람을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거지.

 

신지의 목소리가 다소 허스키하게 흘러 나왔다.

 

양 손에 두 개의 떡을 쥐고 어느 것이 더 맛있을 까를 저울질하는 그런 어른의 마음은 아니야. 그저 순수하게, 정말 순진하게 양 손에 올려져 있는 두 마리의 햄스터를 모두 사랑하고 있는 거야. 어느 한 마리를 더 사랑하지는 않아. 오빠에게 그 두 마리는 모두 똑 같은 햄스터니까 말이야. 다만 다른 사람들이 오빠에게 선택을 자꾸만 강요하고 있는 거야. 네가 보기에는 어떤 햄스터가 더 귀여워? 어떤 햄스터를 가지고 싶어? 한 마리 뿐이야. 그러니 선택해.

 

신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오빠는 그저 그 결정을 내리고 있지 못할 뿐이야. 오빠는 우리 두 사람 중 그 어느 사람도 잃고 싶어 하지 않아. 그 점은 지금 오빠가 내게 하는 행동들을 보면 알 수 있어. 마치 민정이를 선택한 것인 것 처럼 말을 해 놓고도 막상 내가 오빠를 떠난다고 하면 너무나도 싫어하잖아.

 

그건.

 

아니야.

 

민용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신지가 고개를 저으며 민용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내가 하는 말이 맞아. 오빠는 지금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서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 거라고.

 

신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가 오빠에게 선택을 조금 더 쉽게 해주게 하려고 하는 거야. 물론 그 선택이 민정이어서는 안 돼.

 

어째서?

 

민정이는 더 이상 오빠가 없으니까.

 

?

 

민용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는 아직도 모르는 구나. 그 때 민정이가 오빠를 일본이 아닌 러시아로 가라고 했을 때, 그리고 오빠가 그 민정이의 말을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러시아행 티켓을 손에 쥐었을 때, 러시아 행 비행기를 타는 탑승구에서 민정이를 두고 그대로 게이트로 들어간 그 순간들에 모두. 민정이는 오빠를 지웠어.

 

하아.

 

민용이 한숨을 토해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여자란 그래.

 

신지가 민용의 눈을 바라봤다.

 

남자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그 깊은 마음을 다 지울 수 있을 까 생각들 하곤 하지만 여자란 생물이 원래 그런 생물들이야. 여자들이 원래 그렇게 쉽게 마음을 지울 수 있다고, 남자들은 하지 못하지만 여자들은 할 수 있어. 그게 바로 여자이니까 말이야. 그게 여자니까.

 

여자들 무섭구나.

 

무서워.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무서워.

 

나는 몰랐어.

 

그럼 다행이네.

 

신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말이야.

 

정말 확실해?

 

.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지 더 이상 오빠에게 마음 없어. 내가 보증 할 수 없어. 오빠도 알다시피 민정이 너무나도 깨끗한 사람이잖아. 민정이 너무나도 맑은 사람이잖아. 민정이 눈을 통해서는 다 보여. 민정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민정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 말이야. 다 보인다고 그런데 지금 민정이 눈 속에는 말이지, 오빠가 더 이상 비춰지지 않아. 오직 윤호만 보여.

 

!

 

민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윤호?

 

.

 

신지가 걱정스러운 듯 민용을 바라봤다.

 

괜찮아?

 

.

 

민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오빠도 이미 느끼지 않았어?

 

!

 

민용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민정이가 더 이상 오빠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거 말이야.

 

하아.

 

민용이 한숨을 토해내자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구나?

 

민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숨기려 하지 마.

 

시끄러워.

 

오빠.

 

닥치라고.

 

민용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네가 어떻게 알고 서 선생 마음을 하나로 정하려고 해?

 

.

 

신지가 코웃음을 쳤다.

 

오빠는 뭐 다르니?

 

?

 

민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야?

 

오빠도 윤호에게 그렇게 말을 했잖아.

 

신지가 민용의 눈을 바라봤다.

 

오빠가 민정이에 대해서 파악하는 거 그 이상으로 나는 민정이를 파악하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만 민정이의 마음 알고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장담해.

 

하아.

 

민용이 한숨을 토해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서 선생 말이야.

 

하아.

 

신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토해냈다.

 

오빠 정말로 잔인한 사람이구나?

 

신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나에게 묻는 거야?

 

, 그건.

 

됐어.

 

신지가 시선을 외면했다.

 

정말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구나?

 

신지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가 잔인하단 걸.

 

!

 

민용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신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뭐가?

 

나에게 그런 걸 묻는 거니?

 

신지의 눈에 눈물이 툭 하고 맺혔다.

 

나에게?

 

!

 

민용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미안해.

 

정말 오빠라는 사람은.

 

신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는 구제 불능이구나?

 

?

 

화가 나니?

 

신지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게 그런 걸 물어놓고도 화가 나니?

 

!

 

가 버려.

 

신지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오빠 얼굴 보기 싫으니까 나가!

 

!

 

민용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어디다가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악마.

 

!

 

세상에서 가장 독한 악마에게.

 

신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괴이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니 당장 꺼져.

 

.

 

민용이 이마를 짚으며 몸을 돌렸다.

 

후회할 거야.

 

그리고는 병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