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그림자
“어떻게 방송도 잘 나온다.”
“그러게. 못 나올 줄 알았는데.”
경표는 물끄러미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한나. 자신을 이렇게 만든 한나가 방송에 출연중이었다.
“미친.”
경표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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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렇게 멀리 나와도 괜찮은 거예요?”
“그럼요.”
자랑스러운 표정의 복규를 보며 한나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댔다.
“좋다.”
“멀리 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부산의 사람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수많은 인파 안에 섞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한나였다. 정말로 연인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하는 기분이었다.
“부산은 처음입니다.”
“왜요?”
“네?”
“가깝잖아요.”
“가깝다고 모두 오는 것은 아니죠.”
“그런가?”
한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농사일을 바쁘게 사는 복규라는 것을 알기에 납득이 가는 그녀였다.
“뭐라도 마실래요?”
“내가 살게요.”
“아니요.”
한나는 검지를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누나잖아요.”
“네?”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아니.”
“방송국에서 출연료를 주기 위해서 기본적인 정보는 줘야 하는 거 알고 있죠. 어쩌면 나에게 한 번도 누나 소리를 안 할 수가 있을까? 나는 오복규 씨가 내 또래라고 생각을 했었다고요.”
“겨우 세 살입니다.”
“그래도요.”
한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복규의 옆구리를 찔렀다. 복규는 미간을 모으면서도 한숨을 토해냈다.
“도대체 언제 알았습니까?”
“처음부터요.”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요?‘
“나중에 써먹으려고요.”
한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카페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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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다.”
“그냥 앉아만 있는 것도 좋네요.”
“해운대는 늘 좋아요.”
마구 잡으려고 하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그저 구경만 하는 것도 기분이 참 편안했다. 여유로운 느낌이었다.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우리는 그저 여기에 여유를 가지려고 온 거니 충분한 거죠.”
“마치 외국 같아요.”
“부산이 좀 그렇죠?”
아메리카노를 한껏 마시면서 한나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좋다.”
“김한나 씨.”
“네?”
“고마워요.”
“뭐가요?”
“그냥 나에게 이것저것 보여주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아서요. 더 많은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서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나도 혼자서 이런 곳에 다니는 거 아직 되게 많이 겁이 나고 그래서 같이 온 거예요.”
복규는 한나의 손을 꼭 잡고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저마다 힐낏 보고가는 그 시선. 그저 미워하는 시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저 감내하기에는 조금 강한 시선들이었다.
“다들 왜 그러는 겁니까?”
“내가 밉겠죠.”
“김한나 씨.”
“이해해요.”
한나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내가 되게 밉게 생각이 될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말 실수도 되게 잦은 편이고요. 나 혼자서 잘났다고 하는 애를 도대체 누가 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제가 시청자라도 저는 싫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김한나 씨가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한나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죠. 그것을 사람들의 탓이라고 할 수 없어요. 애초에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만든 것이 바로 우리니까. 그런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들이 보기에 나는 그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따름이니까요.”
“하지만 김한나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때로는 다정하기도 하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인 거죠.”
“그런 거 됐어요.”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의 모래를 털어냈다.
“다른 사람들 시선에 하나하나 다 신경을 써봐야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 알고 있으니까.”
“김한나 씨.”
“더 이상 다른 사람들 보고 그러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내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요.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고 오복규 씨 멀어지고 그럴 건가요?”
“아니요.”
복규가 고개를 흔들자 한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봐요. 그거면 된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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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간 김에 좀 더 있지. 당일이 뭐고?”
“내도 더 있고 싶었다.”
“그런데?”
“서울로 가야 한다는 사람을 우예 잡노?”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복규의 말에 득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자는 말이다.”
“햄이 지금 여자 이야기 하나?”
“와?”
“연애도 제대로 못 하면서.”
“원래 그런 사람이.”
“됐다. 내 일하러 간다.”
“오복규.”
득수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점마 저거 벌써 부뚜막에 오른 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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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문제가 생긴 거죠?”
“큰 건 아니고 더빙을 다시 해야 해.”
“아. 네.”
혹시라도 자신이 자리를 비워서 문제가 생긴 것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더빙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지금 들어가면 되는 거죠?”
“가능하겠어?”
“그럼요.”
한나는 눈웃음을 치며 부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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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이 많아요.”
“감사합니다.”
녹음 담당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들 왜 그렇게 김한나 씨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어차피 김한나 씨가 못 하는 거면 다른 아나운서가 대신 해줘도 되는 거잖아. 그런데 애초에 자기가 하던 일이니까 하더라고.”
“그게 당연한 거죠.”
한나의 대답에 녹음 담당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 보살이야?”
“네?”
“때로는 화도 내.”
“제 잘못이잖아요.”
“자기가 무슨 잘못?”
“녹음 이어가죠.”
한나는 더 이상 듣지 않고 다시 부스로 들어갔다. 다른 이야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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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집에 들어가도 되겠어?”
“그럼요.”
송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 이제 나왔다고 했잖아.”
“그러게요.”
“아니 사람의 집을 그런 식으로 무단침입한 사람인데 그렇게 다시 풀어주고 그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조금 삐뚤어진 사람인 거지. 어릴 적에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 선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선배 아침 라디오 있잖아요.”
“안 그래도 고생이다.”
“그러니까요.”
한나는 가방에 미리 준비를 해두었던 비타민을 송아에게 건넸다. 송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들었다.
“김한나 센스 있어.”
“제가 좀 그렇죠.”
“그럼 들어가.”
“고생하세요.”
“응. 자기도.”
한나는 인사를 하고 방송국을 나왔다. 여름인데도 조금 쌀쌀한 기운이 묘했지만 그래도 몸을 추스르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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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접는다고?”
“네.”
필강은 물끄러미 복규를 바라봤다.
“그 여자 때문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와?”
“참외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제가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 그렇습니다.”
“그게 무신 소리고?”
필강은 소리가 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럼 뭐 하고 살겠다는 기고?”
“농사만 지어서는 참외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냥 여름 과일로만 알고 있겠죠.”
“그게 틀린 기가?”
“포도는 와인도 만들고 매실은 효소도 만듭니다. 그런데 참외 가지고 할 수 있는 것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잘 팔린다.”
“아버지.”
“안 된다.”
필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애지중지 아끼는 아들이었다.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니가 아무리 서울 여자를 만난다고 해도 내는 절대로 니를 서울로 보낼 생각이 없다. 무조건 반대다.”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갈 겁니다. 제가 가야 할 곳은 서울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지. 힘이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이놈이.”
“그만 하소.”
실라는 필강을 말리며 팔을 붙들었다.
“우리 아들도 지금 생각이 있어가 지금 서울로 간다고 하는데 그걸 당신이 우예 말릴라고 하는 깁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서 그리 오래 살았던 놈이 터전을 버리고 바로 간다고 하는데 그기 괴안나?”
“아무리 그래도 만야 성주에만 있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여 있는다고 무슨 답이 보이는 겁니까?”
“이놈이.”
“답을 찾고 싶습니다.”
복규의 표정은 진지했다. 실라는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가라.”
“당신.”
“당신도 보내주소.”
실라는 단호했다.
“어차피 당신 아들이 당신 닮아가 성격이 장난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 말린다고. 그리고 요즘 아들이 어디 자기가 살던 곳에서 그냥 사는 것 봤습니까? 복규 정도면 대단한 겁니다.”
“당신은 또 왜 이래?”
“이제 좀 보내주소.”
실라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는 말입니다. 우리 아들이 이곳에 남는다고 했을 때부터 되게 미안하고 마음이 막 아리고 그랬어요.”
“자네 정말.”
“다들 대구로 가고 서울로 간다고 하는데 야는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어가 여 그냥 남아있어야 하는 깁니까? 이제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고 더 많은 것을 보고.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뭘 하자는 거야?”
“그냥 보내주소.”
필강은 깊은 한숨을 토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실라와 복규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모자가 짜고 이라는 기지?”
“여보.”
“됐다. 치아라.”
필강은 그대로 집을 나가버렸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복규의 사과에 실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니 아부지 성격 더러븐 거 니가 진작 알고 있지 않았노? 그러니 그냥 둬라. 저러다가 말 양반이다.”
“그러니까 저는.”
“가라.”
실라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식탁에 올려진 복규의 손을 꼭 잡았다.
“다들 더 넓은 곳으로 가는데 니가 무슨 죄가 있어서 여기에 그냥 묶여서 있어야 하겠노? 그리고 농사는 꼭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지을 수 있다. 기회가 많으니 그냥 있으면 되는 기다.”
“네. 어머니 감사합니다.”
“감사는.”
복규의 어머니 소리에 실라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애써 내색을 하지 않고 손을 내려놓고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무신 고추가 이리 맵노. 눈물이 다 나네.”
복규는 눈물 흘리는 실라를 보며 따라서 고추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에 주먹을 쥐었다.
“고추 정말 맵네요.”
“그렇지. 정말 내가 매운 고추를 샀는 갑다.”
모자는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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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
컴퓨터에 앉은 한나는 한숨을 토해냈다. 인터넷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욕으로 한 가득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에게 이러는 거니? 아우 짜증나. 치킨이라도 시켜야지. 치킨. 치킨.”
한나는 치킨 주문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복규의 전화를 누르려고 하다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오복규 씨도 좀 쉬어야지.”
인터넷을 이것저것 살피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지갑을 들고 문을 벌컥 연 한나의 얼굴이 굳었다.
“고경표.”
“문을 잘 열어주네.”
경표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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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농촌이잖아요.”
“그래도요.”
“무슨 의사가 그래요?”
태민은 입을 쭉 내밀었다. 기자는 언제나 씩씩한 사람이었다. 태민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구기자 씨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여기 할머니들 제 말 아무도 안 듣고. 할아버지들도 막 반말하고.”
“그럼 다 선생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데 존댓말이라도 듣기를 바라시는 거 그게 오버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의사잖아요.”
“아니요.”
기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음이면 그만 두세요.”
“네?”
“여기 다 선생님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거라고요. 그러지 않으면 여기에서 일 못 하세요.”
“구기자 씨는 참 대단하네.”
“제가 좀 대단하죠.”
“영화라도 보러 갈래요?”
“네?”
태민의 갑작스러운 말에 기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내가 구기자 씨랑 같이 영화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여기에서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 건지 나름 선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 그렇죠.”
“저 바쁘거든요. 업무라면.”
“데이트입니다.”
기자는 멍하니 태민을 응시했다.
“지금 뭐라고?”
“데이트라고요.”
태민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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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왜 온 거야?”
“안 보고 싶었어?”
“뭐라고?”
한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네가 왜 보고 싶어야 하는 건데?”
“다른 건 몰라도 몸 섞은 정은 쉽게 잊을 수가 없는 건데 말이야. 너랑 나랑 궁합이 꽤 좋았잖아.”
“아니.”
한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이런 반응에 경표는 살짝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별로였어?”
“응. 너 되게 못해.”
“그랬구나.”
경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를 버린 거니?”
“뭐라고?”
“네가 그래서 나를 버리고 떠난 거냐고.”
“경표 씨 지금 미쳤니? 마지막까지 내가 다시 당신을 붙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두고 간 것은 당신이야. 그런데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지금 당신을 버렸다고? 당신 농담이라도 하는 거야?”
“그럼 나에게 돌아올 거야?”
경표의 진지한 눈에 한나는 한숨을 토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경표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내가 뭐로 보이는 거니?”
“뭐라고?”
“내가 만만해?”
“김한나.”
“그래. 한때는 당신 돈이 좋았어. 그 돈이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다시 당신하고 살고 싶은 생각은 하나 없어. 그거 너무 우스운 일이 아니니? 내가 바보도 아니고 도대체 왜 당신하고 그렇게 얽혀야 하는 건데? 안 그래?”
“우리 시간은?”
“그림자야.”
“뭐?”
“그거 나한테 그림자라고.”
한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경표를 노려봤다.
“내가 잊고 싶은. 나의 청춘을 정말로 어둡게 했던 그 그림자. 당신하고 내가 만난 그 모든 시간들이 겨우 그런 거였다고. 애초에 있을 수가 없었던 거야. 그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거야. 물론 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빛이 강하니까 그림자도 있는 거겠지. 당신은 고작 그 정도야.”
“내가 그림자라.”
경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한나를 바라보더니 숨을 들이쉬었다.
“너는 뭐가 그리 잘났어?”
“잘난 거 하나 없어.”
“뭐라고?”
“하지만 지난 번에 봤잖아.”
한나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돈이 많아?”
“아니.”
한나는 단 번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한나의 반응에 경표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에게 부족하겠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데?”
“뭐라고?”
“나는 그 사람이 돈이 있고 없고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 않아. 그냥 그 사람이라서 좋은 거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을 해?”
“왜 말이 안 되는 건데?”
한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고경표 씨. 당신은 인생을 헛산 거라고. 그런 것이 아니면 연애를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거잖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가 없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잖아. 그래서 당신은 진짜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나에게 이토록 끔찍했던 기억으로 그냥 남아있게 된 거라고. 알아?”
“네가 뭐가 그리 잘 났어!”
“죽여.”
한나는 덤덤하게 말하며 목을 들이댔다.
“어서 죽이라고.”
“김한나.”
“그런 짓을 하면 당신이 어디 괜찮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니? 그리고 당신 부모님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그건.”
“당신은 절대로 나 못 죽여.”
“죽일 수 있어.”
경표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보였다.
“너를 죽이러 왔다고.”
“당신은 잃을 것이 많잖아.”
“뭐라고?”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 없어. 그래서 나는 잃을 것이 없으니까 당신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거야.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잃을 것이 있다면 당신에게 지금 무릎이라도 꿇었을 거야. 다시 만나겠다고 해줘서 정말 감사하다고. 무조건 당신에게 충성할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이 없거든. 그런데 지금 당신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잖아. 지금 당신의 그 직위.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아니. 절대로 당신은 내려놓을 수 없어.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지금 이 순간도 그게 겁이 나는 사람이잖아.”
한나는 덤덤하게 대꾸하면서 경표의 손에서 칼을 가져왔다. 경표는 사시나무 떨 듯 서서 한나를 노려봤다.
“도대체 뭐가 그리 잘난 건데?”
“그런 게 아니야.”
한나는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건 나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당신과 나. 우리 두 사람은 그냥 애초에 만나지 않았어야 하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어쩌다 만나게 된 거지.”
“그게 무슨?”
“헤어져야 맞는 사이라고.”
한나는 경표의 얼굴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이제 제발 제정신 좀 가지고 살아. 고경표 씨. 그래야 내 청춘이 안 아깝게 느껴지지 않겠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청춘이 그림자로 느껴지지 않게 하라고.”
경표는 물끄러미 한나를 응시하더니 한숨을 토해내고 손을 내렸다.
“도대체 너는 왜 나에게 화도 한 번 내지 않는 거야? 막 나에게 다 쏟아붓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달라지나요?”
“뭐?”
“달라질 거 하나 없어요.”
한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당신도 정신 차려. 그리고 잘 살아. 그게 나에게 하는 복수야. 당신 같은 남자를 놓친 거라는. 그런 복수.”
한나는 경표를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경표는 한참이나 서 있다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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