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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인 듯 실재 아닌 실재 같은 소설

권정선재 2014. 10. 28. 18:23

 

실재인 듯 실재 아닌 실재 같은 소설

[뿌넝숴] [우리 모두의 정귀보] [김 박사는 누구인가?]

 

우리는 소설을 읽을 적 주인공과 그들이 사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읽는다. 그러나 소설 안에서 그 존재들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게 되면 독자들은 한없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인물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한다고 가정한 후에 그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을 할 때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특히나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사건을 설정하고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설정을 하는 순간 우리는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소설 안에서 인물이 사라지게 되면 그것이 현실로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거기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뿌넝서], [우리 모두의 정귀보] 그리고 [김박사는 누구인가?] 세 편이 더욱 혼란을 주는 것은 이런 이야기가 비단 한 순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로 다가서게 되고. 그것은 결국 현실과 대척점에 독자들을 마주한다. 결국 우리가 아는 현실과 소설 속의 상황이 매치가 되면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치 속에서 우리는 혼돈으로 빠지게 되고 소설 속 상황과 현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게 된다. 결국 하나의 순간에만 머물러야 하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고 우리는 그 현실 안에서 멍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과연 진실인지. 그리고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환경이 사실인지. 이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말이다. 이 글에서 다룰 세 편의 글은 현실과 가장 닿아있는 소설들일 수도 있다. 그 모호함 속에서 무엇을 진실로 바라보는가는 결국 독자들의 몫으로 향한다.

[뿌넝숴]는 한국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다.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실이자 결국 잊고 지내는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도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미 전쟁이 끝이 났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미 끝이 난 전쟁에 대해서 굳이 다시 이야기를 하기 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다시금 이야기를 한다면 불편한 상황이 생겨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이고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을 소설은 인민군이었던 이의 눈으로 시작한다. 우리와는 조금 다른 객관적일 수도 있는 시각. 우리의 일을 남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사건을 더욱 명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현실로 반드시 일어났던 일이지만 우리가 외면하던 것이 소설 속에서 구현되는 그 순간 우리는 더욱 명확하게 바라보고 단순히 소설 속의 상황이 아닌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진실 임에 대해서 깨닫고 소설에 동조하게 된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더욱 더 우리를 현실의 세계로 가까이 다가서게 만든다. 우리나라 근 현대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다가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죽고 나서야 유명해진 화가 정귀보의 삶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 그다지 화려할 것도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정귀보라는 인물은 굳이 무언가를 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너무하다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 도대체 왜 세상에 이렇게 관심이 없느냐고. 당신이 그래서 정말로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묻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정귀보는 덤덤히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의미한다. 굳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지닌다. 그가 몇몇의 인물들을 만나는 것이 바로 사회적인 어떤 지점이 되고. 결국 거기에 사회의 어떠한 것이 묻어난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개인적으로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과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뿌넝쉬][우리 모두의 정귀보]가 현실과 닿아있는 소설 속 상황에 대한 물음이라면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거꾸로 소설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형식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유명한 심리 상담가에게 보내진 한 여학생의 편지가 전부인데 거기에서 바로 이 소설의 독특한 지점이 발생한다. 딱히 커다란 서사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완성된 또 하나의 서사가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작가는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커다란 울림을 던진다. 중간에 빈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박사의 답장이 있어야 하는 공간 이후에 소녀의 격한 반응이 튀어나온다. 독자들에게 과연 소설 속 상황이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는 것을 넘어서서 도발하는 것이다. 과연 너희는 내가 말하는 비밀에 대해서 알 수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소녀의 편지는 실제로 이러한 일을 겪는 이의 이야기 같다. 그리고 소녀의 울림은 우리에게 어떠한 대답을 강요한다. 우리가 이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작가가 우리에게 그 답을 돌리면서 자연스럽게 소설 속 상황과 현실의 접점을 만들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뿌넝쉬]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건 그대로 소설 속에 담으면서 독자들과의 접점을 만들어내려고 한다면,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직접적이지는 아니지만 간접적인 방식을 사용해서 이것들을 연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서 정점으로 치닫게 되는데 결국 현실이 소설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상황이 밖으로 나오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은 결국 현실하고 떨어질 수가 없다. 소설 속의 상황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하고 닿아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인물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공간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더더욱 우리의 현실하고 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소설 속의 공간과 우리가 사는 공간은 닿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현실이 자연스럽게 묻어나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즘 소설은 이것을 있는 그대로 강하게 담지 않는다. 다만 평범하게 사람이 살아가는 그 모습을 비추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회가 묻어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지나간 시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잊고 사는 진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