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우 안 와?”
“나 약속이 생겼어.”
“약속?”
우리는 나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약속?”
“정태현 씨가 갑자기 나랑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사람이 되게 우울해 보이더라고. 그래서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 좀 하고. 뭐 그러려고 그래.”
“그 사람 좀 이 상한 거 아니야?”
“어?”
우리는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나라. 너 정신 차려.”
“뭘?”
“그 사람 너보다 열 살이나 많아.”
“언니.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사람이 되게 우울해보였어. 언니도 그 사람 보면 나랑 똑같은 이야기 할 거야. 무슨 되게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금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너랑 지금 보면 그 사람은 제대로 출근은 할 수 있는 거야? 이거 내가 더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책임질게요.”
“알았다.”
나라는 가볍게 우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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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태은우? 나라랑 너랑 약속 오늘 취소 되었다고 하지 않았어? 나라 지금 태현 씨 만나러 갔는데.”
“알아.”
은우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우리. 아무리 내가 나라랑 친하다고 해도 너 지금 나 너무 경계하고 밀어내려고 하는 거 아니냐?”
“어?”
“너랑 나랑도 친구거든.”
“우리가 친구였나?”
우리는 혀를 살짝 내밀었다. 은우는 서운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나라랑 어차피 약속 잡았던 거고.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또 다른 내 소중한 친구 너 보러 왔다. 너.”
“하나도 안 반갑거든.”
“그래?”
은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우리에게 다가가서 짐을 받아들었다.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나라랑 친구라고 해도. 솔직히 나랑은 별로 친하지 않았잖아. 네가 이러는 거 되게 낯설거든.”
“나도 내가 낯설다.”
“너 설마.”
“어?”
“이나라 좋아해.”
“어?”
은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우리. 소설 좀 적당히 쓰세요. 소설가 지망생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온갖 소설을 그렇게 써대고 있냐?”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나라에게 이럴 이유가 하나 없잖아. 안 그래? 유난히 나라만 챙기고.”
“너는 싸가지가 없어서 그래. 싸가지가.”
“지는.”
우리는 입을 쭉 내밀고 과자를 진열 했다. 그리고 은우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나라 어디가 그렇게 좋아?”
“어?”
“척하면 척이었던 걸. 그 동안 못 알아챈 내가 등신이지. 네가 걔를 안 좋아하고 이럴 이유가 어디에 있냐? 그 등신 같은 년은 나보다 더 둔한 년이라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너는 혼자서 얼마나 답답했어. 이런 건 그냥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러면 네 속도 덜 시끄러웠을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긴.”
우리는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태은우. 내가 도와줄게.”
“뭘?”
“너랑 나라 사이. 내가 도와준다고.”
“됐습니다.”
은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은우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가볍게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아. 이우리.”
“으이구. 이 등신아. 그렇게 오래 나라 곁에 있으면 뭐하니? 그렇게 친구로만 있을 거면.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네가 걔를 좋아하면. 내가 좋아한다. 이렇게 먼저 나서야 하는 거잖아.”
“그런 마음이 아니니까 이러는 거야. 그냥 이나라가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이 전부라고. 내가 걔랑 도대체 얼마나 오랜 친구인데. 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거냐? 웃기지도 않아요.”
“그럼 너 왜 이러는 건데?”
“어?”
“너 지금 되게 이상해.”
우리는 진지한 눈으로 은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검지로 은우의 가슴을 쿡 찔렀다.
“이우리.”
“너 지금 나에게 거짓말 안 하는 거지?”
“어?”
“태은우. 내가 너랑 나라처럼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 나한테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지?”
“거짓말은 무슨.”
“너 얼굴에 완전 다 티나.”
은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되게 미안하지만. 나라 걔한테 품은 마음 그냥 접는 게 좋을 거다. 이나라 그 바보는 너를 남자로 단 한 번도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거 같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나 그거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어.”
“그런 거 바라는 거 아니야.”
“그럼?”
“그냥 곁에 있는 거야.”
은우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 우리는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은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왜 그렇게 힘든 걸 하려고 하냐?”
“친구니까.”
“뭐 친구? 너는 친구가 지금 그런 마음을 품는 거. 그게 지금 정상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
“그런데?”
“그러게.”
은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남은 과자를 정리했다. 우리는 허리에 손을 얹고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나는 네가 이해가 안 된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된다.”
은우는 박스를 정리하고 의자에 앉았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꼭 물고 그런 은우를 바라보더니 캔맥주 한 캔을 건넸다.
“네가 사는 거냐?”
“그래. 이 왕소금아.”
은우는 씩 웃으면서 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그의 앞에 앉았다.
“이나라 그거. 눈치 더럽게 없어. 그리고 걔 별로라는 거.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 그 녀석하고 친구로 지내고 있으면서 아직도 그 녀석이 완벽하다고 믿는 건 아니지?”
“응. 아니야.”
“그런데?”
“그냥 좋아.”
“그냥 좋다고?”
“응.”
은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라 옆에 있으면 그냥 즐거워. 무슨 일이 벌어지건 그냥 미소만 지어지고. 또 어떤 일이 생길까 막 궁금하고. 그래서 좋아. 뭐. 우리 네가 보기에 나라가 마냥 한심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좋아.”
“하긴 나랑 다르기는 하지.”
우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입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은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은우도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남은 맥주를 모두 마신 후 편의점을 나섰다.
“저거 진짜 계산 안 하네.”
우리는 입을 쭉 내밀고 은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나라는 그렇다치고. 나는 왜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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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카페씩이나 오고 이래요? 그냥 편의점에서 파는 커피를 마셔도 충분한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요?”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요.”
“저 바쁘거든요.”
“저도 바쁩니다.”
태현의 대답에 나라는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왜 보자고 한 거예요?”
“내가 소설을 쓴다고 지난번에 이야기를 했죠?”
“네.”
태현은 심호흡을 하고 소설 뭉치를 건넸다. 나라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태현을 바라봤다.
“이게 뭐예요?”
“그쪽을 모델로 쓴 소설이요.”
“네?”
“그족이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맨 처음 그렇게 당신을 붙든 거. 내 소설 주인공이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였어요. 당신이라는 사람. 되게 내 소설에 잘 어울릴 것 같았거든요.”
“신기하네요.”
나라는 가만히 소설 뭉치를 만졌다. 조금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냥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별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죠?”
“나쁠 거 뭐 있어요? 어차피 나라는 거 아무도 모를 텐데요. 그냥 내 캐릭터만 가지고 간 거면. 뭐 나쁠 건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물론 나에게 미리 이야기를 하고 이해를 구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미안합니다.”
“아니요.”
나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작 이런 것을 가지고 속이 좁게 행동을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태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소설 뭉치를 내밀었다. 나라는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걸 왜요?”
“그쪽에게 주는 거예요.”
“네? 저에게 왜요?”
“평소에 책 잘 안 읽죠?”
“바빠 죽겠는데 책 읽을 시간이 어디에 있어요? 그런데 그런 말을 나에게 하는 거 보니까 되게 잘 나가는 소설가인 모양이에요?”
“나름 잘 나가죠.”
태현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읽을게요.”
“오늘은 그냥 내 하소연을 좀 들어줬으면 해서. 그랬으면 해서. 나라 씨를 잠시 보자고 했어요.”
“하소연이요?”
“아직 우리 잘 모르는 사이긴 한데. 그냥 이나라 씨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되게 잘 들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그런 사람이 아니기는 한데. 말해봐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태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에게 있어서 정말로 소중한 사람.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한 것과 다르게 그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하더라고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요? 양쪽이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다를 테니까.”
“그렇죠?”
“모르겠어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사람하고 사귀는 것도 그렇고요.”
“내가 소설가라고 했잖아요.”
“네.”
“내 아이디어를 내 라이벌에게 가져다 줬어요.”
태현의 덤덤한 고백에 나라는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태현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많이 힘들었겠어요.”
“네.”
“그랬구나.”
나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태현이 자신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오죽하면 자신에게까지 이런 이야기를 할까 싶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자기는 아니라고 하니까. 절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하니까 나는 그냥 그 사람을 믿으면 되는 겁니까? 누가 보더라도.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한 것이 맞는데. 그 사람이 아니고서야 나를 배신할 사람이 없는데. 내가 그 사람을 믿어야 하는 겁니까?”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요?”
“네.”
“믿어요.”
나라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면 그냥 믿을 거야.”
“어떻게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러게요.”
태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의 말을 믿는 것이 가장 마음이 편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일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배신을 당한 것이 분명했고, 그 사실은 너무나도 괴로운 사실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그렇게 생각을 하려고 했는데. 10년 동안 그냥 그 아이를 믿었는데.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니까. 그러니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그렇게 있었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당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요?”
“그런데 되게 신기한 거 있죠.”
“네?”
“이나라 씨를 앞에 두니까 불안함이 사라져.”
태현의 말에 나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거 좋은 말이죠?”
“네. 좋은 말이에요.”
“아니 무슨 좋은 말을 그렇게 불안하게 들리게 해요. 듣는 사람 되게 기분 이상하게 말이에요. 뭐. 그렇게 힘든 일이 있어도 그냥 넘겨요. 그냥 정태현 씨가 듣기에 좋은 방법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랬어요?”
“그리고 정태현 씨가 나보다 열 살이나 많으면서. 이런 일 정도는 나보다 훨씬 더 잘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나라 씨. “예쁘다는 소리 자주 듣죠?”
“네?”
“지금 그쪽 되게 예쁘다고요.”
“갑자기 그게 무슨. 웁.”
태현은 그대로 테이블 너머로 허리를 숙여서 나라에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입맞춤. 그리고 입맞춤이 끝이 나고 나라는 태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있는 힘을 다 해서 뺨을 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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