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고비
“같이 갈 걸 그랬나.”
우리를 먼저 보내고 난 정식은 약간 걸리는 표정을 지은 채로 입을 내밀었다. 하지만 우리가 괜찮다고 하는데 따라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혼자서 힘들 텐데.”
자신이 회의 때문에 너무 자주 사무실을 비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정식은 미안했다. 우리가 힘들 거였다.
“어떻게 하지.”
“저기.”
정식은 고개를 돌렸다. 은화였다. 아마도 그가 퇴근하기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정식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네. 어머니.”
“아니.”
은화는 순간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소리는 좀.”
“알겠습니다.”
은화가 불편한 내색을 내비치자 정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화의 입장에서는 놀랄 수도 있을 거였다.
“시간 괜찮죠?”
“네. 괜찮습니다.”
“그럼 이야기 좀 나눠요.”
“가시죠. 근처에 제가 알고 있는 카페가 있습니다.”
은화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행히 아직 모친은 그가 돌아온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정식은 긴장되지 않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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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을 앞에 둔 은화는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이 있다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서우리 시를 좋아합니다.”
은화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정식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정식의 말에 은화는 멍해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부족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우리 씨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뭘 알고 좋아해요?”
은화의 말에 정식은 잠시 뭔가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은화는 지금 정식과 우리의 사이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따.
“그쪽이 도대체 우리 딸을 어떻게 알고 좋아하느냐고요. 그래요. 조슬 언니 좋은 사람이야. 내가 그건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우리 딸이 잘 모르는 사람 그냥 옆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사귀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정식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모르시는군요.”
“내가 뭘 몰라요?”
“5년간 짝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뭘 안다……. 뭐라고요?”
은화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식은 혀로 입술을 살짝 축이고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서우리 씨까 아직 말씀을 드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약간 저희 사이를 오해하실 것 같아서 말씀을 안 드린 것 같은데. 저랑 서우리 씨는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서우리 씨가 근무하는 회사의 팀장이고요.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반해서 계속 혼자서만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제 서우리 씨의 곁에 자리가 났다는 사실에 제 마음을 고백한 거고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은화는 말을 더듬다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식은 약간 초조한 마음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 그 팀장이라면 우리가 매일 욕을 하던 그 개자……. 아니. 그러니까.”
“맞습니다.”
정식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
“제가 그 개자식.”
“어머. 말도 안 돼.”
은화는 입을 가리고 멍하니 정식을 바라봤다. 정식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은화를 바라봤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서우리 씨.”
정식의 태도에 은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는 싫어요.”
은화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 하기에는 조금 이기적일 지도 모르지만. 우리 딸은 이제 결혼을 해야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쪽은 우리 딸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나이가 어떻게 되죠? 조실 언니에게 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그리 젊지 않다고 들었는데.”
“서른일곱입니다.”
“그거 봐요.”
은화는 의기양양한 기세였다.
“절대로 안 돼요.”
“하지만.”
“아니요.”
은화의 너무나도 단호한 태도에 정식은 침을 삼켰다. 은화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우리 집도 흠이 많은 것을 알지만. 그러니까 나는 더 우리 딸이 만나야 하는 사람은 가정이 멀쩡했으면 좋겠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는데. 그래도 이게 엄마 마음일 거야. 나는 그쪽이랑 우리랑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내 딸이 중요해.”
“네.”
정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화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것을 걱정을 할 수 있을 거였다. 양쪽 가정 모두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는 것. 그게 어쩌면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서우리 씨 어린 아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서우리 씨. 자기가 내린 결정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그러시지 않아도…….”
“뭐라고요?”
정식의 말이 끝이 나기도 전에 은화는 역정부터 냈다.
“그러니까 그쪽 말은 지금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에까지 나선다. 뭐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됐습니다.”
은화는 콧방귀를 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에서 뭐라고 하든 나는 헤어지라고 할 거예요. 그러니까 내 딸 더 이상 흔들지 말아줘요.”
은화는 그리고 정식의 대답도 듣지 않고 카페를 나갔다. 정식은 머리를 헝클며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꽤 복잡하네.”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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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도대체 왜 자꾸 걔를 만나는 거야?”
“만나?”
재필의 말에 선재는 미간을 모았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어차피 나랑 걔랑 헤어진 사이인데 왜 자꾸 형이 그렇게 하냐고. 아까도 보미랑 있는데 나타나서 얼마나 난처했는지 알아?”
“그럴 게 뭐가 있어?”
선재의 말에 재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랑 너랑 헤어진 사이인데 도대체 내가 왜 우리를 보면 안 되는 건데?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네 짐을 가져다주려고 온 거야.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거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재필은 머리를 마구 헝클며 입을 내밀었다.
“도대체 누구 편이야?”
“편이 어딨어?”
“형.”
선재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재필은 괜히 한 바퀴 돌고 이리저리 목을 푼 후 삐딱하게 선재를 올려 봤다.
“도대체 이러는 게 어딨어? 내가 형 동생이지 우리가 형 동생이 아닌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너랑 우리가 사귈 적부터 우리가 너무 아까웠어. 너에 비해서 과분하다고 생각했다고.”
“그게 형이 할 소리야?”
“왜? 안 돼?”
“당연하지.”
재필은 혀로 아랫니 안쪽을 훑었다. 선재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 그런 재필을 가만히 응시했다.
“형은 지금 가족 편을 들지 않는 거야? 내 편을 당연히 들어야 하는 거지. 이미 헤어진 애 편을 왜 들어? 걔가 얼마나 나 무시를 하는지 알아? 내가 취업도 못 한다고 얼마나 개무시를 하는데?”
“미친.”
“형!”
선재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처럼 네 꿈을 응원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 우리가 언제 한 번 너에게 취업하라는 이야기 한 적 있어? 없잖아. 그런데 네가 어린 여자에게 연락을 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우리를 차놓고서는. 지금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됐어.”
선재는 재필의 짐을 재필에게 내밀었다. 재필은 볼이 퉁퉁 부은 채로 그것을 받아들며 선재를 노려봤다. 선재는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본 재필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하고 싶은 말 해.”
“우리니까 너 견딘 거야.”
“뭐? 형은 형 일이나 잘 해. 남의 일에 관심 갖지 말고. 친형도 아니면서 괜히 그렇게 나서지 말라고.”
재필은 그대로 선재의 가게를 나가 버렸다. 선재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치한 새끼.”
선재는 한쪽 볼에 바람을 넣은 채로 가게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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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리.”
“엄마. 안 잤어?”
우리는 집에 들어오다 은화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은화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 도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엄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 왜 말을 안 했냐고!”
“뭘?”
“조실 언니 아들. 팀장이라며?”
정식과 만난 모양이었다.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은화가 알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게 뭐 아무 일도 아니야. 도대체 엄마가 왜 그러는 건데? 이거 내 일이야. 엄마가 신경을 쓸 일이 아니라고요.”
“뭐 그런 말이 다 있어?”
은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우리는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여기에서 물러날 수 없었다.
“엄마 나 정말로 그 사람이 좋아요. 나에게 너무 잘해주는 사람이야. 내가 힘들 때 도와줬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뭐가 어때서? 나 다쳤을 때 데려다 준 사람도 그 사람이잖아요.”
“나는 그래도 싫어.”
은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 했잖아. 나는 싫다고. 네가 흠이 하나도 없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엄마가 이러는 게 이기적인 거니?”
“당연하지.”
우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은화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지만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엄마. 이제 나는 내 일을 내가 알아서 하고 싶어요. 엄마도 나 믿잖아. 팀장님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게 사실이야?”
“뭐가요?”
“6년.”
세상에 그 이야기까지 다 한 모양이다.
우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화는 무슨 말을 하려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 아니야?”
“이상한 사람 아니야. 나한테 아직 존댓말도 하고요. 팀장이지만 나한테 함부로 하지는 않아.”
“네가 그 개... 암튼 그랬잖아.”
“일로는 그렇지. 그게 오히려 더 멋있는 거고. 엄마. 엄마 딸이 고른 남자인데 못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아주머니 보면 알잖아. 옆집 아주머니 좋은 분인 거. 그런 분이 키운 아들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유. 나는 모르겠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은화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는 거였다. 우리는 은화를 꼭 안았다. 은화는 그런 우리의 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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