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데이
“오늘 맥주나 한 잔 하자.”
“그래, 우리 한 번 뭉치기는 해야지.”
"이번 주는 안 되다.”
“왜?”
저는 그냥 미소지었습니다. 친구 녀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군요.
“네가 좋아하는 그 치킨 집 갈 건데?”
“그리고 너 월급 받잖아. 그런 식으로 입 닦고 말 거냐?”
하여간, 귀신들입니다. 저보다도 제 월급 날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돈은 쓰면 안 돼.”
“왜?”
“이번 주에 화이트 데이가 있잖아.”
“화이트 데이?”
“너는 애인도 없잖아?”
아픈 곳을 쿡쿡 찌르는 군요.
“그래서 만들어 보려고 그런다. 왜?”
“오.”
“정말?”
녀석들 눈빛이 이상합니다. 왠지 오싹해지는 걸요?
“누구야?”
“뭐, 뭐가?”
두려워집니다.
“으흐흐.”
“말해줘!”
분명히 저를 간질이려는 겁니다. 저는 간지럼을 못 참거든요.
“싫어!”
이 녀석들이 알면 큰일 날 겁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에게도 분명 당황스러운 일이 될 것이겠죠? 저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납니다.
"야!”
“치사하게.”
휴, 살았습니다.
“너 기분 좋아 보인다.”
“응?”
“무슨 일 있지?”
제가 좀 웃고 있었나요?
“내가 무슨 일 있을 게 뭐가 있냐?”
일단 한 발 물러서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루 종일 웃고만 있어?”
“나는 웃고 있으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친구가 눈을 가늘게 뜹니다.
“그래도 너 수상하다는 말이야.”
“네가 형사냐?”
“형사보다도 감각이 좋거든요.”
“웃기네.”
여기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가볍게 무시해주는 센스가 필요한 순간이지요.
“둘이 뭐 하냐?”
다른 친구입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 언니 오늘 애인 만들었다.”
친구가 씩 웃습니다.
“어?”
“정말?”
“응.”
얘는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한 퀸카였습니다. 인근 지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우리 학교는 여학교였는데도 불구하고, 참 많은 고백을 받았더랬습니다. 물론 여자들에게까지도요. 본인은 굉장히 싫어하는 거 같으면서도 뿌듯해 하는 듯 하죠?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직 애인을 만든 적은 없었는데, 대학에 온 지 일주일만에 애인을 만들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이것도 대단한 게 맞는 거죠?
“누구인데?”
“그 복학생 오빠.”
“우와!”
“정말?”
복학생 다운 분위기가 하나도 없던 그 귀여운 오빠를 꼬시다니, 역시 퀸카는 퀸카의 능력이 있는 걸까요?
“너 재주도 좋다.”
“히.”
친구가 브이를 그립니다.
“그런데 두 사람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이런, 겨우 화제를 돌리나 했더니,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는 건가요?
“맞아.”
화살이 돌아왔군요.
“얘, 오늘 기분 너무 좋더라.”
“아니, 나도 기분 좋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응.”
“아냐.”
친구들이 아니라 원수들입니다. 이것들을 친구라고 믿고 살고 있다니, 저도 참 한심한 년이죠.
“그게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라서 말이야.”
“뭔데?”
눈이 초롱초롱하군요.
“누가 나 좋아하는 거 같아.”
“정말?”
“우와!”
“누군데?”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니까 비밀.”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그러게 말이야?”
“여자의 직감?”
“오, 직감.”
“그런데 어느정도 맞을 거 같아?”
“이번 화이트 데이가 최대의 승부수?”
“너 잘 됐다!”
“정말.”
친구들이 더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 우리가 더 기대된다.”
“킥.”
분명히 그 남자 벗겨 먹으려고 할 겁니다. 제가 말려야 겠죠? 그나저나 금요일까지 어떻게 기다리나요? 휴.
그녀는 친구들과도 사이가 좋은 모양입니다. 지금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군요. 제 친구들은 그녀의 친구를 보고 퀸카라고 하는데, 저는 제가 사랑하는 그녀가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조금 이상합니다. 평상시보다 기분이 훨씬 좋아 보이는 걸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요?
“뭐해?”
“어?”
선배 누나입니다.
“뭘 보고 있는 거야?”
그러더니 저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너 쟤 좋아하는 거야?”
눈치가 무지 빠르군요.
“네.”
“너, 귀엽다.”
그러더니, 제 볼을 주욱 늘입니다. 저기 선배. 이래뵈도 저 스무살이거든요. 이런 짓은 좀 삼가심이?
“그, 그만하세요.” “부끄러워하기는.”
싱긋 웃습니다.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다더니, 정말인 모야입니다.
“화이트 데이를 노리고 있는 거야?”
“네?”
족집게입니다.
“맞구나?”
대단하기도 하군요.
“내가 도와줄까?”
“아니요!”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이러면 일만 복잡해지거든요.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요.”
“그래라.”
“선배 쟤한테 무슨 말이라도 하시려는 거 아니죠?”
“그래.”
다행입니다.
“그래, 그럼 잘 해봐라.”
“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보는데, 이런 그녀가 자리를 떠나버렸군요. 하여간 저 선배 때문에 되는 일이 없습니다.
“정말, 안 말해줄 거야?”
“잘 되면 말한다니까.”
“치.”
휴, 다행히 이제는 포기한 모양입니다.
“그러면 그 때는 정말 말해주는 거다.”
“그래.”
겨우 이 녀석이 수긍하네요. 그나저나 다른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조르지는 않겠지요?
일주일 조금 넘게, 그녀를 지켜본 바, 매일 이 시간에 도서관에 가더라고요. 손에 바구니를 들고 있기가 다소 창피합니다만, 그래도 사랑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겠지요? 아마, 그녀가 보기에는 꽤나 낭만적일 겁니다.
“야, 저거 봐.”
“어머.”
도서관 열람실이 소란스러워 집니다. 무스 일일까요?
“야, 저거 좀 봐.”
“응?”
친구도 덩달아 흥분을 했습니다.
“왜?”
“빨리.”
“자, 잠시만요.”
겨우 사람들을 뚫고 창문에 섰습니다.
“뭐?”
“저 남자 말이야.”
웬 남자가 도서관 앞에 서 있습니다. 손에는 예쁜 바구니를 들고 있군요. 아마도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걸까요?
“어?”
고개를 든 사람, 그, 그입니다!
“으.”
3월의 중순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꽤나 춥습니다. 나름 신경 쓴다고 캐주얼 정장을 입고 나왔는데, 영 아닌 거 같죠?
“어?”
저기 누군가가 뛰어옵니다. 자세히 보니 제가 고백을 하려고 마음을 먹은 그녀입니다. 혹시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걸까요? 그러면 안 되는 데 말이죠.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을 갑자기 세워서 고백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어? 그런데 왜 제 쪽으로 뛰어 오는 거 같을까요? 저의 착각인가요? 정말로 저에게 오는 건가요?
“헉헉.”
제 앞에서 숨을 고르는 그녀의 모습이 참 예뻐보입니다.
“저.”
“네?”
“저에게 할 말 있으시죠.”
그리고는 그녀가 싱긋 웃습니다. 아, 모두 알고 있었군요. 저의 마음이 그렇게 티나게 두근 거렸었나봐요.
“여, 여기요.”
저는 얼른 사탕 바구니를 건넸습니다. 그녀가 미소를 짓습니다.
“일주일 기다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너 뭐하냐?”
“응? 언니 무슨 일이야?”
언니가 재밌다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너 내가 저번에 말했지. 우리 과에 완전 순수한 애 하나 들어왔다고.”
“응.”
“걔가 너 좋아한단다.”
“어?”
마, 말도 안 됩니다. 나 같은 애를요?
“정말?”
“그래.”
우와, 저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 군요. 화이트 데이가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지만, 저 역시 이 남자를 꽤나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여차하면 제가 꼬시려고도 했었죠.
“안 추워요?”
“여기가 따뜻해요.”
그러면서 제 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가져갑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참 따뜻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도요.”
화이트데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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